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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n의 세계>
    후기/책 2024. 3. 1. 20:19
     
    3n의 세계
    이 책은 30대 한국 여성의 몸에 대해 가감없이 다룬 ‘웃픈 에세이툰’이다. 구체적으로는 20대에서 30대로, 미혼에서 기혼으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겪은 일들을 아주 세밀하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제2회 SF어워드에서 중편 ≪사마귀의 나라≫로 대상을 받은 박문영 작가는, 그간 여성과 환경을 소재로 한 다양한 저서를 집필해왔다. ≪3n의 세계≫를 자신의 30대가 담긴 “허름한 표류기”라고 표현한 저자는, 자전적 캐릭터인 고양이 ‘골골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의 몸에 얽힌 다양한 일화를 거침없이 터놓는다. 만화와 에세이가 함께 구성된 이 책을 읽다 보면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맞아 나도~!” 하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빵 터지게 웃다가 “아니, 이런 경험을…” 하면서 ‘골골이’와 함께 놀라고 심각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자신을 폭로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솔직함, 무거운 소재도 통쾌한 한방으로 웃게 만드는 해학은 이 책의 확실한 매력이다. 작가의 모든 달고 쓴 경험을 녹여낸 이 책이 30대를 통과한 독자들에게는 애틋한 공감을, 30대를 앞둔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만 새로운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저자
    박문영
    출판
    한겨레출판사
    출판일
    2019.10.30

     

    초등학교 저학년의 여아가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현함에도 애정표현이라며 할아바지뻘 약사가 입맞춤을 퍼부었다. 지나가는 아빠뻘 취객이 여아의 둔부며 가슴을 만졌다. 하굣길에 작은아빠뻘 아저씨가 대화를 나누자는 이유로 손목을 움켜쥐며 강제로 공장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여고, 여대 근처 음산한 길목에서 여학생이 지나갈 때마다 덥수룩한 머리의 마스크를 쓴 삼촌뻘 남성의 성기를 흔하게 목격 당한다. 수영 교육 시간에 역시 막내삼촌뻘 강사는 열 살도 채 안 된 수영복 차림의 학생의 어깨를 붙들고 입 맞추는 시늉을 해 보이며 동료와 키득거린다.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자 네가 날 좋아해서 맞춰줬다며 가스라이팅하고 볼일이 끝난 뒤엔 본체만체하는 무책임한 성인 남성도 여럿 맞닥뜨렸다. 이 모든 무례에 대한 이유는 아주 가지 각색이었다. 혈기가 왕성해서, 심신이 미약해서, 애정표현이 다소 진해서, 여지를 줘서. 성추행이 아닌 성추행에 가까운 것으로 여상히 넘겨졌다’.

    대학생이 되니 화장 좀 하고 다니라며 화장 안 하는 남자 선배들이 핀잔을 준다. 여성의 26살은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비유되곤 한다. 결혼 후에는 남자는 집안일이 서투르니 섬세한 여자가 하는 것이 마땅하다. 남자는 애 같은 면이 있어 여자가 처신하기 나름이다.

    외조하는 남편에게 내조하는 기혼 여성은 정절을 지키며 아름답고 현명하기까지 해야 한다. 고된 육아로 활기를 되찾고자 짬을 내어 카페라도 다녀오면 남편이 벌어 온 돈을 축내는 벌레가 된다. 운전대를 잡은 두 손이 김여사니 보라니니 낄낄거리는 소리를 잠자코 듣는다.

    이상 29년간 경험의 축약이다.

    남자는 성급하고 분을 못 이기니 여자가 참아야 한다. 월경은 생리라는 개괄적 명칭으로 통칭되고, 그마저도 내색하면 불경하게 여겨져 그날, 마법과 같이 수치스런 현상인양 에둘러 표현된다. 생리대는 검은 봉지 안에 숨겨 결코 드러내 보여선 안 된다. 여자로서 조신해야 하고 조심함으로써 여지를 줘선 안 된다.

    남녀는 평등하다고 받아온 교육이 무색하게도 편중된 잣대는 전 사화적으로 만연하고 이는 궁극적인 사회적 통념과 전혀 거리가 멀다.

    육체적 차이와 개인적 특성의 구분은 너무도 모호하고, 단순한 성별의 차이를 넘어선 여성향과 남성향의 이분법적 경계는 여전하다. 남자 놀이, 여자 놀이 편 가르기 하던 세 살 배기의 유아기적 사고가 여든까지 변함없어 보인다.

    차라리 그만하면 다행이지. 힘의 원리에 따른 차별은 성별이란 프레임을 쓰고 언제나 도마 위에 오른다. 부당함에 높인 목소리는 곧잘 투정으로 치부된다. 이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참으로 아메바적 사고 회로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상대적으로 누군가가 감수할 불편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왜 모를까.

    근래에 내가 쓴 신변잡기에 가장 자주 등장한 키워드는 서른이 목전이다. 어느덧 아득한 인생이란 여정 속에서 마냥 멀 줄만 알았던 30이란 구간은 턱밑까지 차올랐다. 이런 내 처지가 <3n의 세계>란 제목에서 시선을 빼앗긴 이유다.

    호기심에 넘긴 책의 내용은, 30대 여성의 일상이 담긴 에세이에 국한되기보다는 표지에서처럼 분투기가 실로 걸맞은 표현이다. 첫인상은 살짝 가벼웠고 차츰 무게감이 들지만 읽어 나가는데 막힘은 없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덤덤하게 펼쳐지는 저자의 자유로운 사유에 종종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남성 문인들의 여성의 신체에 대한 구닥다리식 표현을 비판한다든지, 피구란 여성이 신체 활용력에 대해 트라우마를 갖도록 고안한 구기 운동임이 틀림없다.라는 문장은 호쾌하기까지 하다.

    소설가 박완서가 시인 고정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남자들이 여성 문제를 건드릴 때에는 여성을 자꾸 대상화하지만 여성은 체험만으로도 여성 문제를 잘 쓸 수 있다.는 말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또한 느낀다, 여성의 체험은 대상화의 존재가 아님을.

    편의의 추구가 누군가의 생존과 존엄 위에 자리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일상과 회상을 넘나들며 비단 여성뿐 아니라 로드킬과 같이 당연시되는 소외와 희생을 복기한다.

    환멸 속에서도 각자의 원을 벗어나 서로 포개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묵묵히 림보를 건넌다. 자신에 심취하지 않고, 누구도 짓누르지 않고 다른 존재와의 원만한 동행을 꿈꾸는 작가의 다짐에 진실로 공감한다. 그리고 응원한다.

    이 책은 30대를 기점으로 통과하는 누군가에겐 회고록이자 진입을 앞둔 누군가에겐 참고서다. 작가의 조언대로 나 역시 다가올 낯선 3n 초가에 지레 겁먹지 않고(그러나 수상한 고랑은 주의하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시간이 흘러 익숙해질 무렵, 새로이 3n을 맞을 누군가에게 보다 단단해진 나의 3n 초가를 위트 있게 들려주고 싶다.

     

    • 키워드: 30대, 림보, 동행
    • 한 줄 평: 30대 진입을 앞둔 이를 위한 참고서.

     

    남성 문인들은 누이의 젖가슴, 고향의 젖줄기, 봉긋한 젖무덤 어쩌고 식의 삼엽충만큼 오래된 표현을 제발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슴은 그렇게 아스라한 곳에, 희뿌옇게 자리하지 않는다. 그건 저속하지도 신성하지도 않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우리 몸에 현존하고 있으니까.
    여성 외관의 자연스러운 가변성을 불허하는 광고들이 점차 옹색하게 느껴졌다. 좀 놓쳐도 돼. 붙잡고 늘어지지 마. 민낯이 무례하다고 겁주면 너나 잘하라고 대꾸하자.
    몸에 병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느끼는 건 내 뇌가 고통에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리 걱정하고 겁을 먹어봤자 통증은 새롭고 강하다. 그러니 처방을 받고 심호흡을 한 뒤 오래 누워 있는 수밖에. 가능한 건강한 식단을 내게 제공하는 수밖에. 어제까지 쌓인 힘을 믿고 쉬어. 세상에 안 껴도 돼. 잠결 우주에서 나의 유한함을 조용히 격려하는 방법밖에.
    키치, 울화, 불통, 여혐, 배금주의, 바닥난 인권 감수성이 범벅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K-정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정서가 은연중에 만연한 한국은 타인을 몹시 의식하는 동시에 타인에게 깊게 상처를 내는 사회이며 그 속도도 5G를 능가한다. 언제 어디서든 결과를 쉽게 평가한다.
    폭언만큼 적을 쉽게 만드는 짓도 없을 텐데 어리석은 간섭이다. 이들은 미래를 위한 각종 보장 보험에 가입하면서 왜 말로 자신의 신용자산을 파괴하나. 하지만 입으로 배설물을 내뱉은 사람은 창피해하지 않는다. 문제는 언제나 그걸 듣는 사람이 창피하다는 것이다.
    저항과 마찰 없이 완성된 것은 없다. 지금 구간에 붙들린 하나의 장면 뒤로는 만 개의 배경이 있을 것이다.
    신체는 본인 자신의 것이며 그 운용에 관해서는 당사자의 결정이 제일이란 걸 왜 다들 잊고 있는 건지. 어째서 기괴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이 영역에 관여하는지. 고통에 대한 상상을 타인에게 왜 적용하지 않는지.
    우리 각각은 때때로 지표화 분석의 대상이 된다. 종과 횡의 좌표로 자리한다. 그리고 그건 엄청나게 작은 점이다. 잊지 않아야 할 건 그 티끌이 움직이고 숨을 쉬는, 그러다 덧없이 꺼지기도 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에너지는 흐르고 모든 관계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알 수 없는 영역은 드넓다.
    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유머 감각이란 방어 기제와 다를 바 없다. 둘은 함께 성장한다. 강력한 현실 조건에 대항하려면 나름의 완충지대를 확보해 자극을 튕겨내야 하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들 개그의 뿌리는 다름 아닌 시니컬, 세상만사에 대한 냉소와 환멸, 악조건 속에서 다져진 코미디언 기질은, 본의 아닌 해학과 풍자와 골계미는 그래서 너무 웃기고 너무 슬프다.
    ‘인간이란 그럴 수 있다’라는 판단은 얼마나 관대하고 여유로운지. ‘인간인 이상 그럴 수 없다’라는 판단은 얼마나 강인하고 소모적인지.
    30대의 특혜란 게 있다면 뭔가를 진지하게 아낄 줄 알고, 거기에 성의와 정성을 놓지 않는 사람이 예전보다 더 빛나 보인다.
    미래와 야망이 흐릿하고 어디서나 색깔 없이 섞이기 일쑤여도 괜찮다. 심신을 정직하게 꾸리는 사람이라면, 가슴팍에 원석이 박힌 사람이라면, 빛은 어떻게든 새 나오고 그건 해가 갈수록 잘 감지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우열을 줄 세우지 않고 각각의 현성과 잠성을 보려는 훈련은 매일의 식사만큼 필요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맑고 잔인한 요구를 하고 있지 않을까.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으로.
    작은 텃밭의 연두색 토마토를 보며 생각한다. 도래할 나날이 비극이라 말하는 건 현명할 태도일지 모른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엇비슷한 예측 속에서도 그 세상을 살아갈 사람들의 안식과 사랑을 어떻게든 찾아내는 거라고. 그래야 각자의 원을 벗어나 다른 원과 포개질 수 있다고.
    성장이란 영원히 불가할지 모른다. 복잡다단한 인간이 일지라는 타협적 형식을 택하면서 그의 신경질적 면모, 심도 있는 정신분석이 필요한 내부는 역설적으로 다시 은폐된다. 인류 대부분이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쓴다는 일기는 어쩌면 가장 오래된 위장술 아니면 망각을 위한 강박일지도 모르겠다.
    가난은 억만 개의 층으로 이뤄진 계단 같아서 먼 저편을 보면 까마득하지만 바로 위 칸과 아래 칸은 그저 촘촘해 보인다. 비교와 자족은 둔중하고 정교하게 이뤄진다. 그리고 이계단은 오래전에 늘어나버린 아코디언이라 더 이상 아래가 위로, 위가 아래로 요동치지 않는다.
    고독이 어쩌면 충만과 비슷한 뜻이란 걸 체감하게 되는 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새로운 슬픔과 새로운 기쁨을 마주하는 순간은 사실 멋지기도 하다.
    지속성 없는 온정은 시혜 아닐까. 고민과 염려를 거친 어떤 종류의 무관심은 윤리의 최종 지점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정적인 편애란 각자도생과 얼마나 다른가. 책임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그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독식을 멈추라는 말에 귀 기울이는 게 먼저다. 편의의 추구가 누군가의 생존과 존엄 위에 자리할 순 없다. 당연한 소외와 희생을 전제로 한 효율적 공간이란 길이 아닌 지옥의 가장자리, 림보니까.
    전화위복이라는 말, 달리 생각해 보란 말, 견디면 괜찮아질 거란 말은 고맙고 든든하다. 그 다독임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호의와 선량에서 나온다. 하지만 어떤 시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언어도 매몰차고 부정확한 부산물로 느껴질지 모른다. 의식과 무의식을 온전히 번역하는 언어는 없으며 있어도 실패에 가까울 테니까. 그러니 우리에겐 넘치는 말 대신, 우두커니 입을 다무는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다.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지혜로운 여자는 방법을 골똘히 고민하고 미친 여자는 이미 강을 건너 가있다.” (세계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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