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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방법>후기/책 2024. 4. 27. 13:06
지금도 여전히 어렵지만, 거절이 곧 공포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시간과 에너지를 매번 소진할 수밖에. 그러나 자의로써도 낭비하기 아까운 시간을 타의에 밀려 철철 쏟아붓기엔 인생은 한 번뿐이고 짧지 않은가.
책을 읽다 보니 떠오르는 바로는, 자기중심과 이기적인 것은 분명한 차이가 따른다는 점이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산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가치판단은 스스로가 내리고 정할 수밖에 없다. 역지사지도 결국 완벽하게 타인의 입장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의 내면을 직면하는 자기중심적 성찰은, 미처 몰랐던 자신의 이면을 발견하며 깨달음으로써 날이 갈수록 더욱이 다양하고 무궁무진해질 타인의 심오한 의중 또한 어느 정도 파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기중심이란 나도 너도 덜 상처받기 위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 두기가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쉽사리 내리는 규정과 배척은 금물이다. 마찬가지로 지나친 이입 또한 경계해야 한다. 내가 상대방의 무례함을 거절할 자유가 있듯 상대방 또한 내 거절에 실망할 자유가 있다. 내가 상대방을 이렇게 생각하듯, 상대방 또한 그럴 수 있지,라는 두 발짝 물러선 약간의 무심함, 수용도 반드시 필요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사람과 삶은 그렇지 않아도 척박하며 외롭잖나. 요컨대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을 다루는 매번 유연성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은 결국 무례한 사람이 주된 타이틀이지만 결국 대인관계를 주요 핵심이다. 좀 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객관화를 적절히 이끌어내게끔 리딩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계발서랄지 내지는 현명한 언니가 들려주는 힘이 실린 조언이랄까. 연애, 직장 동료 등 일상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예시로 공감이 배가 되어 막힘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다.- 키워드: 무례, 자기객관화, 대인관계
- 한 줄 평: 현명한 언니가 들려주는 힘이 실린 대인관계 조언.
출근할 때면 걸리적거리는 자존감을 작게 접어서 집에 두고 나서곤 했는데, 너무 자주 숨겨두다 보니 정작 필요할 때조차 꺼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음의 문제를 찾아 보듬어줄 때, 몸은 밸런스를 찾아나간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시소를 타듯 서로를 배려하며 영향을 주고받을 때 맺어진다.
에너지 흡혈귀란 상대의 착한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인 방법으로 상대의 기를 빼앗고 분노하게 만드는 존재.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던지는 질문보다 남들에게 받는 질문이 더 많아진다. 어른들은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도 정작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답답해한다. 그 과정에서 성공에 대한 기억일수록 과장되고 미화되어 우연한 사건조차 필연으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그걸 잊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이렇게 말한다. “왜 이것밖에 못 해?”
시시한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당신이 원하는 건 뭐야??”가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라고 질문을 바꿔보자. 그러면 어느 날 또 다른 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괜찮아?”라는 사실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종종 해야 하는 질문이다.
뭔가 변화를 모색해 관계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고자 고민하는 사람들은 ‘권태기’란 말을 쓰지 않아요.
사람의 자존감은 말로 한다고 높아지는 게 아니고, 실제로 객관적인 인정을 받거나 성취감을 느꼈을 때 높아집니다.
기억 또한 보정된 사진 같아서 사실 그 자체보다는 편집과 자기애가 꾸덕꾸덕 뭉쳐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회상할 때는 ‘상처를 주었다’라는 기억보다 ‘상처를 받았다’라는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것 같다.
사회는 무책임하게도 개인에게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라고 떠넘기고 개인은 새파래진 얼굴로 우물쭈물 답을 찾고 있는데, 그러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반대로 생각하면, 별 쓸모가 없는데도 살아 있으니 더 대단한 일 아닌가.
현실을 뚜렷하게 보려면 어쩔 수 없다는, 적당한 체념이 필요하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바뀌었을 때의 황금빛 미래만 보려고 하면 현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내가 겪지는 않았더라도 누군가에겐 지금 일어난 현실인데, 잘 모른다는 이유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취급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런 대접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더 거칠고 센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잘 모르니까,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모르니까, 쉽게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그런 역지사지를 꾸준히 해나가야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다양한 입장과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느끼는 것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꼭 자신이 직접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으로 살아볼 순 없지만, 상대를 이해해 보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하고 공감 능력을 발휘할 순 있다. 상상력이 곧 타인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도 결국은 상대의 ‘의외성’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점을 유심히 보고, 거기서 특별함을 찾아내는 일이다. 취미나 말버릇, 취향 같은 것에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아내 그 위에서 조금씩 서로의 색을 덧입히는 커스터마이징 같은 것이기도 하다.
나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 완성된다.
우리는 저마다 읽히기를 기다리는 책 같아서 누군가를 나를 읽어나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를, 대충 읽고선 다 아는 양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다른 책 사이에서 나만의 유일한 가치를 발견해 주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정작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지?
나에게 상대의 부탁을 거절할 자유가 있듯이, 거절당한 상대가 나에게 실망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면 그 모든 사람에게 휘둘리게 된다.
관계의 기울어진 추를 파악한 상대는 무리한 부탁임을 알면서도 계속하게 되고, 부탁을 받는 사람은 일그러진 인정욕구와 피해의식이 겹쳐 자꾸만 의기소침해지고 예민해진다. 부탁받은 일을 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이 기껍고 편안한 상태여야 한다. 예의 바르게 부탁을 거절했는데도 자꾸 하소연하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옆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의 감정을 믿어라. ‘불쾌하다’라는 감정은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허락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하는 무덤덤한 인식은 상대에게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는 다짐이 되기도 한다.
서로 상처받지 않고 대화를 종결하는데 필요한 자기만의 언어를 준비해두어야 한다.
핵심적인 것은 ‘일일이 상처받지 않는다’와 ‘상대방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는다’이 두 가지다.
중요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주변의 소음을 낮춰야 한다. 가끔은 남이 자신을 방해할 때 ‘쉿’을 외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작 나의 목소리가 묻혀 세상에 들리지 않게 될 테니까.
일상에서 무례한 사람이 당신을 평가하거든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하고 넘겨버려라.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하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나를 잘 모를뿐더러 나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지도 않는다.
회사에 대해서는 약간 체념한 채로 일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난 원래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이며 공감 능력이 떨어져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이 말에는 ‘그러니 네가 이해해야 한다’라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다. 관계란 서로 노력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행복감은 관계의 양이 아니라 질이 결정한다… 깊이 있는 관계는 함께한 시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가득 차 있다.’
첫 번째는 문제가 되는 발언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 두 번째는 되물어서 상황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 못 한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되물으면 더욱 좋다… 세 번째는 상대가 사용한 부적절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 들려주는 것이다… 이상한 논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역지사지를 경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는 무성의하게 반응하는 것… 다섯 번째는 유머러스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자꾸 참으면 내가 무기력해진다. 무례한 사람을 만난다면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만의 대처법을 갖춰야 한다.
인생에는 아주 약간의 ‘어쩔 수 없지’하는 체념이 필요한 것 같다. 온 힘을 다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로 인한 상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생활 기스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게 체념하면 콤플렉스가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은 그것만 빼면 괜찮은가?’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라는 틀렸다. ‘그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준임이 분명한가?’와 ‘단점이 개선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일단은 적당한 거리를 둔 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난감한 재고 취급을 받더라도 ‘이게 끝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 만큼 나라도 나를 믿어야 균형이 맞춰질 테니까. 비관할 것 천지인 세상에서 희망을 찾는 방식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관계하는 타인들에게 영향을 받고, 그의 일부가 나의 일부가 된 후 작별하고, 이를 통해 성장한다. 졸업식에서 우는 학생은 영원히 학교에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작별의 의식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지 말고요. 상대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서운함 때문에 마음속에 뾰족함이 자라나 뼈 있는 말로 자꾸 상처를 주게 된다면 그 관계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이때는 서로 지쳐서 그런다는 걸 알아차리고 서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사람을 빠르게 판단해 편을 가르는 것이 습관이 되면 만나는 사람의 영역이 더는 확장되지 않고 멈춰버린다. 주변에 생각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만 두면 사람은 급속도로 ‘꼰대’가 되고 만다.
내가 맞고 그 사람이 틀려서 내 보기에 그가 못마땅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만 아직 만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좋고 싫음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다 보면, 언젠가 인연이 닿아 좋은 관계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휘둘린다는 느낌이 들 때, 사람들을 만나지만 자꾸 헛헛해질 때 인간관계에 관한 기준을 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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