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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식으로 보기>후기/책 2024. 4. 27. 13:05
회화에서 현대의 광고로 이어지며, 또한 회화를 인용한 광고와의 연관성까지 서술하는 점이라던가, 숫자로만 매기는 목차 구분이라던가, 뚜렷한 기준이 모호한 이미지의 배열 등등. 미술사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를 알듯 말 듯 종잡을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섹션 별로 중심 화두가 짜여있긴 하지만 저자는 내용 전반에 걸쳐 ‘대상화’란 논제를 중심으로 지배-피지배적 구조, 젠더, 인종, 정치적·경제적 문제 등 시대를 둘러싼 여러 가지 차원에서의 관점을 제시하고 일깨워준다. 개인적으로 남성적 응시는 둘째치고 여성의 자기검열을 다룰 때에는 솔직히 충격이었다. 알게 모르게 나 또한 여성으로서 일상의 대부분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면에만 치중하고 몰두하진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과격하고 급진적이며 때로는 두서없는 서술과, 또한 저자가 말하는 논제 자체로도 일각에선 편협적일 수 있음을 굳이 한계로 들 수 있다. 때문에 다소 아쉽지만, 개개인만 두고 보면 허를 찌르는 문장이 상당하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 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토록 획기적이라니. 한편으론 씁쓸하다.
- 키워드: 미술사, 방식, 통찰
- 한 줄 평: 기존의 아카데믹하고 보수적인 감상 방식을 망치로 깨부수는 통사글 모음.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 준다. 우리는 우리 주위를 에워싼 이 세계를 말로 설명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이야기하든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타인도 우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자신 역시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시각의 상호작용적 성격은 대화의 상호작용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비록 모든 이미지가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긴 해도, 어떤 이미지를 보고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애초에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작품의 상상적 차원이 풍부하면 할수록, 그것을 만든 예술가의 가시적 세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진다.
문화적 가정들은 사실상, 세계의 실상을 명확하게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비화하여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를 신비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결국 과거의 미술은, 특권을 지닌 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를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유럽 미술 특유의 원근법의 관습은 모든 것이 관찰자의 눈에 집중된 것으로,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되었다… 원근법은 두 눈이 아닌 하나의 눈을 가시적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다… 가시적 세계는 관찰자를 중심으로 정돈된다. 원근법의 관습에 따르면 시각적 상호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근법의 내 적인 모순은 한 장소, 한순간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현실의 모든 이미지가 정돈된다는 점에 있다.
카메라는 시간의 경과라는 관념을 시각적 체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무한대의 소실점에 모이듯이 모든 것이 인간의 눈으로 한데 모인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특히 영화 카메라는 어디에도 중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끊임없는 유동 속에서 도망쳐 사라지는 것이었다. 입체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그들이 묘사하는 사물 또는 인물 주위의 여러 다른 각도에서 본 광경들을 한데 모은 전체를 가리켰다.
원작의 의미는 그것이 독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나온다… 근대 사회에서 마술이나 종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힘이 아니므로 ‘예술 작품’은 가짜 종교성의 분위기로 포장된다. 예술 작품은 마치 성물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제시된다. 성물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소실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유래와 계보가 증명됐을 때 비로소 예술로 선언된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든 간에 그림 전체의 동시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뒤바꾸거나 결론을 다시 내릴 수 있다. 그림은 자체의 권위를 잃지 않는다.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복제는 계속 사용된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혹은 새로운 기술로 복제한 예술을 이미지를) 그 어떤 보호 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
과거의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남자의 사회적 존재는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능력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한 남자의 존재감은 그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시사한다.
이와 반대로 한 여자가 드러내는 사회적 존재는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녀가 타인 앞에 실제로 어떤 모습을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그녀에게 거의 본질적인 것이다.
여자들의 사회적 존재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보호, 관리를 받으며 그 여자들 나름으로 살아남으려고 머리 쓰고 애쓴 결과로 이룩된 것이다…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한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이렇게 감시하는 부분과 감시당하는 부분이라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두 구성요소로 이뤄져 있다.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갖는 생각은 이렇게 타인에게 평가받는 자기라는 감정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결국 어떻게 대접받을지를 결정짓는 것이다.
모든 여자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어떤 것이 허영 되고 어떤 것이 허용되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규제의 지배를 받는다. 직접적인 목적이나 동기가 어떻든 간에 그 여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지를 말해 주는 일종의 표지로 읽을 수 있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누드는 언제나 관습에 의해 정해지며, 이러한 관습의 권위는 특정한 미술 전통에서 비롯된다…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벌거벗은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평범성이라는 요소가 개입하게 된다. 이 평범성이란 단지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 되기까지 타인은 어쨌든 신비스러운 존재다… 이 신비감의 상실은 주로 시각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시선이 성기로 옮겨 가면 곧바로 그것의 형태 자체가 보는 사람을 일방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 버린다. 즉 타인의 존재는 가장 기본적인 성적 범주인 남성 혹은 여성으로 축소되거나 격상된다.
유럽의 누드 예술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
마네의 <올랭피아>를 티치아노의 원작과 비교해 보면, 전통적인 역할을 맡은 그림 속 여인이 그 역할에 대해 어느 정도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화의 전통적 시각 방식의 토대는 인상주의 시기에 허물어지기 시작해서 입체파에 의해 완전히 뒤집혔다. 이와 거의 동시에 사진은 시각 이미지의 주된 원천으로서 유화가 차지하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전통적 유화 시대는 대략 1500년에서 1900년까지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재산과 교환 방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결정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은, 다른 시각예술이 아니라 바로 유화에서 시작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유화의 전통에 중요한 변화가 생기는 최초의 계기는 풍경화에서 나타났다. 라위스달, 렘브란트(풍경화 연구를 통해 익힌 빛에 대한 감각을 작품에 적용), 컨스터블(J.Constable, 스케치에서), 터너, 그리고 유화 시기의 마지막에 등장한 모네(C.Monet)와 인상 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이룬 혁신은, 실체를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꼼꼼한 묘사에서 벗어나, 형체가 뚜렷하지 않고 손으로 쉽게 만질 수 없는 상태를 묘사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유럽의 유화로 대표되는 문화를 하나의 전체로 본다면, 그것의 모델은 세상을 향해 난 창이라기 보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즉 가시적인 사물들을 한데 모아 저장해 둔 금고.
재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건 자본주의 사회와 문화다. 하지만 강박적 집착에 빠진 주체가 집착하는 것은 언제나 대상의 자연스러운 속성으로 보이게 마련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서 인식되지 못한다.
위대한 예술가란 평생 투쟁을 해 온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열악한 물질적 환경에 맞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의 몰이해에 맞서,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맞서 투쟁을 하는 사람.
광고는 겉보기에 전과 딴판으로 변화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러한 변화의 결과로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남을 사로잡는 매력(glamour)이란 곧 선망의 대상이 되는 데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광고는 바로 이러한 매력을 제조해 내는 과정이다.
광고는 쾌락을 찾으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일깨워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광고는 쾌락의 실제적인 대상을 제공할 수 없다. 어떤 쾌락을 얻는 본래의 방식을 떠나서 정말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광고란 결코 쾌락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의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glamour)인 것이다…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인물들의 힘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행복 속에 있다… 이들은 그들의 매력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다른 사람들의 선망의 시선을 무관심하게 관망하는 것이다.
유화는 문화적인 유산에 속한다. 그것은 교양 있는 유럽인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따라서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거의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얘기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것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광고가 선전하고 있는 물품을 사는 일이 사치인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가치 있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하는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 형식이다.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의미 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뤄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의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적인 행동에 의해 대치된다.
꿈이란 언제나 꿈꾸는 사람의 개인적인 것이다. 광고는 꿈을 제조해 내지 않는다. 광고가 하는 일은 단지 우리 각자에게, 우리는 아직 남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지만 장차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광고는 계속 연기되는 미래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현재를 배제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생성과 발전의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린다. 광고 안에서의 경험이란 불가능하다.
광고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정치적 현상이다. 그러나 광고가 창조하고 인용하는 것들은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반면, 광고가 제공하는 것은 좁은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획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이 능력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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