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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소유>
    후기/책 2024. 4. 27. 13:06
     
    무소유
    지나치게 소유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법정 스님이 전하는 깨우침의 이야기 『무소유』. 법정 스님의 이야기에 담긴 삶의 지혜는 종교를 넘어서 우리의 삶에 깊숙이 닿은 일상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이 책은 법정스님이 세상과 인생에 대해 쓴 지적 통찰의 글을 하나로 묶어서 소개한다. 소유와 집착에 대한 섬광같은 깨달음을 기록한 〈무소유〉를 비롯하여 〈가을은〉, 〈오해〉 등 35 편의 주옥같은 수필들을 만나보자.
    저자
    법정
    출판
    범우사
    출판일
    1999.08.05

     

    동네 근처에 있는 길상사를 종종 찾다 보니 법정스님의 유지로 절판됐음을 알게 된 <무소유>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책 주인에게 빌리면서 싱글벙글 들뜬 마음으로 가방 안에 집어넣는데, 이내 들려온 한 마디가 머릿속을 뎅 울렸다, 소유에 집착하면 그게 <무소유>야?

    그렇다.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공허함만이 남던 그간의 소모된 감정과 시간에 몸서린 친 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미욱한 중생은 여전히 무소유의 본질을 깨닫지 못해 다시금 소유에 집착하고 만 것이다.

    문외한이 읽기에도 접근 장벽이 그리 높지 않아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한창 머리 쥐어짜며 전전긍긍하는데 슬며시 다가온 원숙한 어른으로부터 아가, 애쓰지 말고 내려놓아라. 그러면 편해질 게다.하고 위로받는 느낌이랄까.

    빌렸던 책을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실물을 비우는 대신 마음에 남는 문장들을 무형 가치로 남겼다. 마음속에 온갖 고뇌로 꾸역꾸역 가득 찰 때, 법정스님의 귀한 깨달음이 담긴 사색을 두고두고 찾아 읽고자 함이다. 고뇌를 비운 자리를 잠언으로 채우다 보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통찰력이 깊어지면서 참된 해탈의 경지를 조금은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돌이키는 일상적인 훈련을 거듭하여 더 이상 마음에 따르는 게 아닌 마음의 주인이 되어보리라.

     

    • 키워드: 무소유, 여백, 침묵
    • 한 줄 평: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복원된 불국사는 그 같은 회고조의 감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득 들어찼기 때문에 기댈 만한 여백이 없어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저런 짓을 뭣하러 할까 싶지만, 당사자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니게 된다. 그 절대성이 때로는 맹목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낭비적이요 퇴폐적인 일까지도 취미라는 이름 아래 버젓이 행해지는 수가 있다.
    바람직한 취미라면 나만이 즐기기보다 고결한 인품을 키우고 생의 의미를 깊게 하여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해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진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봐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우리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 일지도 모른다.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일상이 지겨운 사람들은 때로는 종점에서 자신의 생을 조명해 보는 일도 필요하다. 그것은 오로지 반복의 깊어짐을 위해서.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의 동작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활발한 사고 작용도 따른다. 툭 트인 시야는 무한을 느끼게 한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둬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아하, 종합병원이란 곳은 참으로 종합적으로 진찰을 하는 데로구나. 주머니 실력도 종합적으로 공평하게 분산시키는 데로구나.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하는 것도 따지고도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러한 마음을 돌이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이라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화나는 그 불꽃 속에서 벗어나려면 외부와의 접촉에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그보다도 생각을 돌이키는 일상적인 훈련이 앞서야 한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사실 책이란 한낱 지식의 매개체에 불과한 것, 거기에서 얻는 것은 복잡한 분별이다. 그 분별이 무분별의 지혜로 심화되려면 자기 응시의 여과 과정이 있어야 한다.
    나그네 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자신의 속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이 단순한 취미일 수만은 없다.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그러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여러 가지 지식에서 추출된 진리에 대한 신념이 일상화되지 않고서는 지식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대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 우리가 서로 증오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나그네들 아닌가.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시키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뭘까. 밖에서 문지르고 발라 그럴듯하게 치장해 놓은 게 아름다움은 물론 아니다. 그건 눈속임이지. 그건 이내 지워지고 만다. 아름다움이 영원한 기쁨이라면 그건 결코 일시적인 겉치레일 수 없어. 두고 볼수록 새롭게 피어나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하나의 발견일 수도 있어. 투명한 눈에만 비치기 때문이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과 다를 게 없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만이 사물을 깊이 통찰할 수 있고 또한 자기 존재를 자각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 언어를 갖게 되고 자기 말에 책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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