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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가 섞였지만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 본인의 생의 일부가 녹여져 반영된, ‘부끄럼 많은 생을 보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된 수기는 어쩌면 저자 자신의 <변명의 서>로 여김직하다.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서 펼쳤지만 어려운 문체도 아님에도 읽으면 읽을수록 난해함과 동시에 빠져들게 된다.
읽다가 보면 너무 남과 여, 무구와 타락, 신뢰와 불신이라는 흑백 논리만을 두고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싶지만. 저자가 생을 보낸 시대 문화적 배경을 감안하자면 문학적 비유가 가리키는 본질을 파악하는 덴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개별성만을 두고 보자면 결국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자이의 페르소나라 볼 수 있는 주인공인 요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내가 얼마나 모두를 무서워하는지. 무서워하면 할수록 남들은 나를 좋아해 주고, 남들이 나를 좋아해 주면 좋아해 줄수록 나는 두려워지고 모두한테서 멀어져야만 하는 불행한 기벽’이라던가,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서글픈 버릇’은, 가히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괴리감과 공감의 혼재다. 읽는 내내 요조에게서 나를 보았고 또한 그를 보았다. 때문에 처연하고, 지독한 고독의 굴레에 몸서리쳐진다.
이상과의 괴리감에, 또 사람에게 상처받고 두려워하면서도 우리는 수도 없이 인간을 향해 구애한다. 어떻게든 부대끼려 노력하고자, 음산한 도깨비처럼 일그러진 초상을 마주하며 인간 실격이라 자조한다. 결국 우리 자신이 인간 그 자체니까.
요조가 그토록 두려움에 떨면서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본질을 끊임없이 되묻고 이에 대한 답을 추구하려는 모습을 보며 ‘참 외로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인생과 고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연적인 숙명, 불가결의 귀결인가 보다.
그러니 여운이 남는 만큼 전혀 개운치 못해 찝찝하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 안도감인지 위안인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결국 통달에 미치지 못한 고뇌와 해소되지 못한 갈증 탓에 한없이 암울해지는 나야말로 <인간 실격>인가 싶다. 적어도 20대인 요조는 소위 필사적인 서비스라 일컫는 익살과 처세에라도 능했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나이 서른에도 인간 구실조차 못하고 있으니.
그러면서도, 지금껏 살아왔던 대로 익살과 처세를 멀리하고 싶다. 이래저래 인간 실격자일 수밖에 없으면 괴리감에 치를 떠느니 그저 본연의 모습 그대로 나답게 살고 싶다. 그것이 설령 모두의 기대를 저버릴지라도.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이는 반박할 수 없는 진리니까.
- 키워드: 인간, 도깨비, 변명
- 한 줄 평: 일그러진 음산한 도깨비의 자기 고발적 자화상.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를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정열이란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인간의 마음에는 속을 알 수 없는 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다. 욕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허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색(色)과 욕(慾), 이렇게 두 개를 나란히 늘어놓고 보아도 부족한 그 무엇. 저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인간 세상의 밑바닥에는 경제만이 아닌 묘한 괴담 비슷한 것이 있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괴담에 잔뜩 겁먹은 저는 소위 유물론이라는 것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긍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인간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고 새싹을 보고 희망의 기쁨을 느끼거나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것이 저의 서글픈 버릇의 하나인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무슨 득이라도 보려고 그런 꼬리를 단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흥이 깨지면서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이 질식할 만큼 끔찍해서… 그것이 비록 잘못되고 시원찮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서비스 정신에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습성 또한 세상의 소위 ‘정직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실된 걸작. 여러 번 이사 다니는 사이에 없어져 버렸지만 분명히 뛰어난 그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이것저것 그려봤지만 그 기억 속의 걸작에는 미치지 못했고 저는 언제나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느른한 상실감에 괴로워해 왔던 것입니다. 마시다 만 한 잔의 압생트. 저는 그 영원히 보상받지 못할 것 같은 상실감을 혼자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림 얘기가 나오자 제 눈앞에 그 마시다 만 한 잔의 압생트가 아른거렸습니다. 아아, 그 그림을 이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내 재능을 믿게 하고 싶다는 초조감에 몸부림치는 것이었습니다.
저야말로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내도 죄가 되지 않는 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 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처럼 인간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속이는 것도, 건드리지 않으면 탈이 없다느니 하는 똑똑하고 교활한 처세술과 마찬가지 얘기가 되는 걸까요.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 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잘도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저는 도대체 세상에서 말하는 ‘방자한 놈’인 건지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 너무 약한 놈인 건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죄악 덩어리였던 듯, 끝도 없이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작품 해설 요약]
<인간 실격>은 혜택받은 자로서 못 가진 자에 대한 죄의식 내지는 부채 의식을 업보처럼 짊어지며 자기 파멸에의 열정에 사로잡혔던 다자이 오사무가, 평생 동안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들을 허구화한 작품이다. 세상을 합법적 세계에 속하는 남성 세계와 비합법적 세계에 속하는 여성 세계로 나누어, 사회의 실세를 형성하고 있는 남성 지배 세계에서 소외된 주인공 요조가 결국은 어느 세계에도 귀속하지 못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자이는 1936년 4월에 맹장염 수술 후 복막염으로 회복기 진통제로 사용했던 파비날에 중독됐고 6개월 뒤에 치료를 위해 정신 병원에 수용된다. 그렇지 않아도 천성적으로 인간과 그 삶을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고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공포를 느꼈던 다자이는 믿었던 아내와 스승 이부세 마스지가 자신을 속이고 정신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사실로 인해 극도의 인간 불신으로 내몰렸다고 볼 수 있다. 10월 13일부터 11월 12일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다자이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데 결정적으로 일조한다.
더구나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이 아내 하쓰요가 다자이와 극히 가까웠던 인척인 한 화가와 불륜을 저지른 사건으로 다자이는 하쓰요와 함께 칼모틴 음독 정사를 기도했지만 자신은 실패하고 그녀는 떠나보낸다. 그러나 그 후 다자이는 자기가 하쓰요를 버렸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정신 병동에 수감되어 인간 실격자가 되었다는 인식과 자기혐오, 그때 그를 데리고 간 누구보다도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은 하쓰요의 불륜으로 인해 <인간 실격>에 그려진, 그가 무엇보다도 아끼고 동경하던 “순수한 것”, “무구한 것”, “신뢰”를 산산조각 나게 만든 치명타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 <인간 실격>은 이렇듯 다자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서 어둡고 자조에 찬 작품이다.
어떻게든 사회에 융화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럽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는 패배의 기록인 이 작품은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고발 문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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