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후기/책 2024. 10. 5. 16:18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의 산문집『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불혹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정력적인 창작활동을 하면서 그 특유의 신랄한 시선으로 인간의 내밀한 갈등의 기미를 포착하여 삶의 진상을 드러내는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던 박완서 산문집이다. 표제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비롯하여 45여편의 산문이 수록되었다.
    저자
    박완서
    출판
    세계사
    출판일
    2002.03.29

     

    약고 되바라진 도시깍쟁이와 상반된, 우직하고 천진한 시골뜨기 박완서의 삶의 정수가 담긴 산문집. 일상 속에서 인간다움을 끊임없이 자문하고 추구하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특히 다자녀를 둔), 여자로서, 작가로서의 시선과 신조는 세대를 초월해서 공감을 잣기도 하고 상당 부분은 큰 일깨움을 줬다.

     

    아직 지금의 내 나이로서는 따르지 못할 연륜이기도 하지만 마흔의 등단이라는 결코 이르지 않은 나이에도 시대적 획을 그은 지성인으로서의 노련함도 필연한 게 아닐는지.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그 괴리감이 수십 해가 지난 지금과도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또한 담백하고 소탈한 문체는 잔잔한 호수에 파장을 그리는 조약돌처럼, 결코 파격적이지 않으면서 어딘가 모르게 고요한 충격을 받았다다. 역시 명불허전. 두고두고 이끌리는 문장력이다.

     

    • 키워드: 시골뜨기, 꼴찌, 박완서
    • 한 줄 평: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 그리고 위로.

     

    내가 한사코 혼자 살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외롭지 않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순순히 외롭다고 대답한다. 그게 묻는 이가 기대하는 대답 같아서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너는 안 외롭냐? 안 외로우면 바보’라는 맹랑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 이 오기를 어찌할 거나.
    집은 편안한 만큼 헌 옷처럼 시들하기가 십상인데 그 헌 옷을 새 옷으로 만드는 데는 여행이 그만이다. 그러나 때로는 집도 낯설고 불편할 때가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손님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공경과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임금님은 벌거숭이이라고 외칠 수 있는 겁 없는 정직성을 지녔다고 생각할 때 한결 더 아이들 눈치가 보인다.
    생명이 소멸돼 갈 때일수록 막 움튼 생명과 아름답게 어울린다는 건 무슨 조화일까? 생명은 덧없이 소멸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이어진다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남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배제하려면 제 목청을 높일 수밖에 없다. 남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일 태세가 돼 있으면 그건 이미 극단적인 편견이 아니다. 극단적인 편견이 때로는 옳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게 혐오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그 폐쇄성 때문에 그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이 용기와 다르듯이 편견은 신념과 다르다. 신념은 마음을 열고 얼마든지 남의 옳은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살찌우려 들지만 편견은 남의 옳은 생각을 두려워하는 닫힌 마음이다. 결국 폭력이나 편견이나 똑같이 허세일뿐 진정한 힘은 아니다. 그러니까 정말 두려운 건 목청 높은 편견이 아니라, 그 목청에 대세를 맡겨버리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소극적인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똥을 피하는 건 더러워서일 뿐 무서워서가 아니라는 말은 자신에 대한 변명은 될지 몰라도 여럿이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 대해선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다. 너도나도 똥을 피하기만 하면 이 세상은 똥통이 되어버릴 것이 아닌가. 똥은 피할 게 아니라 먼저 본 사람이 치우는 게 수다. 인간답게 사는 길도 나만 인간답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인간 답지 못하다. 이웃이 까닭 없이 인간다움을 침해받는 사회에서 나만은 오래오래 인간다움을 지키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몇천 년을 두고 늙은이는 젊은이 하는 짓에 “말세로다 말세로다” 한탄을 하는 짓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도 말세는 안 왔고 젊은이들에 의해 역사는 발전해 왔지 않은가.
    생활에 맥이 풀리면 권태로울 것은 당연하고 자연히 딴 곳에서 재미나 자극을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줘야 할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 아닐까. 완성되고 구비된 물건이나 행복이 아니라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 말이다… 스스로가 얻기 위한 과정을 거치면서 어려움도 알고 재미도 알도록 도와주지 않고 덮어놓고 과정을 건너뛰도록 도와주려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그것은 거의 사는 의미를 빼앗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르게 기르려는 것도 싸움질이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는 것을 저해하고 조소하는 온갖 악덕… 이루 열거할 수도 없는 숱한 악덕과의 싸움질이다. 그럼 매일 이런 악전 고투에 임해야 하는 사는 무엇일까? 신념과 투지에 넘치는 호전적인 용사라도 된단 말인가. 천만에, 영문도 모르게 소집되어 최전방에 세워진 일개 초라한 졸병이다. 졸병은 왜 싸우는 것일까?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졸병이니까. 안 싸우면 자기가 죽으니까. 글쎄 어느 쪽일까. 아무튼 훈장을 위해 싸우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달까.
    이런 일 저런 일을 돌이켜보게 되고 후회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시시한 후회 끝에 마지막 남은 후회는 왜 이 어려운 세상에 아이들을 낳아 주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후회가 된다. 그리고 황급히 내 마지막 후회를 뉘우친다. 후회를 후회한다고나 할까.
    그래 도전을 하려거든 철저히 해라. 온 빈 강정인 기성세대에게 너희들의 알찬 내실로 맞서거라… 지독하게 공부하고 밤새워 명작을 읽고 진지하게 고민하거라. 그리고 답답한 일이 있거든 답답해하거라. 답답한 것과 맞서거라. 답답한 것을 답답한 줄 모르는 바보야말로 구제할 길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무슨 사건이 있을 때마다 지당하신 말씀은 범람한다. 그러나 지당하신 말씀은 무력하다.
    편견은 나쁘다. 편견은 나쁘지만 있는 건 있는 거다.
    기계가 부드럽게 돌기 위해서 알맞은 양의 기름을 쳐야 하는 것처럼 한 가정이 가족끼리의 친애감을 유지하면서, 제각기의 삶도 즐겁게 영위하기에 알맞은 만큼만 돈이 있는 집을 보통 사는 집으로 치면, 기름이 너무 없어 부속품끼리 쇳가루를 떨구며 마멸해 가는 상태는 가난이겠고, 기름이 너무 많아 기계를 조이고 있던 나사까지 몽땅 물러나 기계의 부분품들이 따로따로 기름 속을 제멋대로 유영하는 상태가 아마 부자이겠다.
    사람이란 특별한 사람 아니면 대개 자기가 사는 위치에서 가까운 범위밖에 보지 못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범위 역시 그렇다.
    돈이 귀하다는 것도 알만큼은 알지만 세상에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믿음과는 바꿀 수 없고, 돈을 자기를 위해서는 아낄 줄도, 남을 위해선 쓸 줄도 알고, 자기 일, 자기 집안 일관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더라도 크게는 관계되는 사람들과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 돌아가는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의 그른 일, 꼬인 일, 돼먹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할 수 없어, 그런 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져야 하는 양식의 소유자도 바로 이 보통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무슨 재주로 사람이 집어먹은 세월을 다시 토해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코 세월을 토해 낼 수는 없으리란걸, 다만 잊을 수 있을 뿐이란 걸 안다. 내 눈가에 나이테를 하나 남기고 올해는 갈 테고, 올해의 괴로움은 잊힐 것이다.
    저희들끼리 하는 짓이 너무 약고 되바라지고 세련된 도시적인 아이들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시골뜨기스러운 아이들한테 더 정이 간다. 여기서 내가 시골뜨기스러워 보인다는 건 외모나 옷차림이나 말씨 같은 게 아니라 속에서 풍기는 우직함, 단순함, 천진함 같은 걸 말한다… 요새는 아무리 두메산골에 가도 외모가 시골뜨기인 사람은 많아도 내가 원하는 그 우직, 단순한 시골뜨기성이 내면으로부터 풍기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다. 하물며 도시 한복판에서랴. 그러니까 내 시골뜨기성에의 그리움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 같은 걸 거다.
    나는 요즈음 같은 초겨울이 싫다. 한자리 속에서 체온을 맞댄 부부 사이의 간극, 제 속으로 낳은 자식과의 간극, 내가 속한 사회의 사고와 내 사고와의 간극, 친구와의, 동포와의 간극을 어쩔 수 없이 의식하게 되는, 그래서 몸보다 마음이 먼저 추워오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높은 사람의 점잖은 모습도 기회만 있으면 엉망으로 재구성을 하려 든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구성한 대상에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 쓰레기처럼 덮쳐 오는 일상의 권태와 악덕으로부터 손끝 하나 까딱 않고 탈출한 것으로 생각하는 내 비열함이다. 늘 그렇듯이 문제는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투명하게 밖으로 내비치지 않는다는 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큰 축복일까.
    나는 내 마지막 몇 달을 철없고 앳된 시절의 감동과 사랑으로 장식하고 싶다. 아름다운 것에 이해관계없는 순수한 찬탄을 보내고 싶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여기저기 허둥대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아름다운 것을 봐 두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탐욕이다. 탐욕은 추하다.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한 책가방의 무게만으로 한창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러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나 아닐지.

    '후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횡설수설하지 않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법>  (0) 2024.10.05
    <사이>  (1) 2024.10.05
    <인간 실격>  (3) 2024.10.05
    <무소유>  (0) 2024.04.27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방법>  (1) 2024.04.27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