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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후기/책 2024. 12. 13. 17:51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이 책은 기록하려는 인간, 그 기록을 수집하려는 인간, 수집된 기록을 재해석해서 다른 것을 창조하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어떤 기록을 물려받았는지를 살아 있는 동안 되새김질하는 자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카이브는 멀게는 앞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기록이며 가깝게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호모아키비스트의 사례를 멀리서 찾지 않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와 너, 내 친구, 부모
- 저자
- 안정희
- 출판
- 이야기나무
- 출판일
- 2015.11.23
이 책에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는 뛰어난 관점과 유용한 정보가 많다. 기록관리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일상을 자기 시선으로 기록하고 싶은 사람, 상처라는 패인 홈을 기록으로 보듬고 싶은 사람은 우선 새로운 종류의 아카비스트가 될 일이다.
원래 아카이브(Archive)는 ‘정부의 기록’ 혹은 ‘공문서’의 의미였다가 지금은 ‘기록’이나 ‘기록물을 보관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기록하고 기록물을 살피는 행위는 자신을 만드는 과정이다. 기록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기록은 살아가는 목적이자 방법이며 생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불멸을 꿈꾸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사고의 가장 근본적인 틀인 언어는 사회적 약속으로 인간의 생각과 활동은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의 독자성은 사람들과 더불어 엮이며 사회로 흘러나왔다가 다시 자신만의 창의적인 생각과 행동을 잉태한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유의 틀을 만들어 사람들이 더 나은 미래와 인류의 삶을 꿈꾸도록 돕는다. 이를 기록의 확장성이라 하겠다.
개인의 사적인 글쓰기와 그 기록물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밝히고 공공기록물로 인지, 공유, 활용할 방법을 꾀한다면 개인을 넘어 더불어 살아가는 ‘인류’가 될 것이다. 누구나 저만의 방법으로 자유롭고 다양하게 글을 쓰지만 ‘더불어’ 인류가 되는 일은 또 다르다.
아카이브는 나의 성장과 시대적 흐름을 한 타래로 엮는 일이다. 보통 사람들의 기록물에 공공성을 살피는 일은 개인에게서 인류를 발견하는 일이다. 인류를 만드는 일이다.
아키비스트는 기록물로부터 거리감을 확보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기록물을 생산하는 제1의 나도 아니요, 기록물을 살피는 제2의 나도 아니요, 주관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쟁취한 ‘제3의 나’가 된다.
기록은 목소리를 가져야 하고 그 소리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아카이브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억저장소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잘 살아보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우리는 과연 기록으로 남길 만한 이야기를 만들며 살고 있는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하지 못한 채 과거를 답습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쓰인 것들로부터 나를 발견하는 시간, 아카이브가 필요하다.
인간의 역사는 근원도 의미도 알 수 없는 폭력에 하릴없이 상처 입는 개개인들 삶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해결 방법을 찾는다.
우리가 하는 상상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실마리가 된다.
상상이 현실 세계를 바꾸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동안 사실을 알려야 한다. 공유의 토대가 견고하고 깊고 방대할수록 상상은 현실이 된다. 앞선 세대의 기록으로부터 과거를 배우고 타인의 삶을 참조로 내 인생을 살아간다. 이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호기심과 상상력은 미래, 즉 다른 세상을 꿈꾸는 원동력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공유의 기억과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기록’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간의 의지가 ‘지워서는 안 될 기억’을 선택한다. 기억과 경험은 사회 공유의 주춧돌을 세우는 일이다. 주춧돌을 튼튼하고 강건하고 켜켜이 쌓는 시작이 바로 기록이다.
공유 기억이 얕을수록 참사는 반복되고 비극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 모든 이야기를 기록으로 보존하고 사람들이 자꾸 읽어야 비극을 일으킨 사람들이 진실로 세상살이를 두려워할 것이다.
생활사와 문화사가 결여된 국가나 전쟁 중심의 역사 서술은 실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요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잘못된 방향으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과거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반추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가장 밑바닥인 주춧돌이 탄탄하지 않다는 뜻이다.
의식이 변하려면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가
백 년 못 된 사람들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도 맡아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상처받은 인간은 기록하며 자신을 치유한다. 기록은 쓰는 이의 마음부터 어루만진다. 인간이 기록에 몰입하는 이유다. 또한 기록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지만 늘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록물이나 증거가 보여주는 객관적인 사실도 때로는 편견이나 정서 앞에서 거부당한다. 마음을 움직여야 증거는 비로소 두터운 사회의식(편견)을 넘어 사실이 된다.
악이 눈앞에 있을 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악은 거듭 창출된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주체다.
상처를 드러낼 때 공명의 소리로 크게 같이 울려야 비로소 세상이 바뀐다.
인간의 역사는 살아온 날들이 소멸하는 것에 끊임없이 저항해 왔다. 때로는 그림과 사진으로 장면만을 살리고 때로는 긴 이야기로 여러 장면을 재구성했다. 이는 모두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요, 그간의 경험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시도다. 잊고 살 수 없는 장면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후대는 그 너머의 시간과 공간을 본다.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하던 공유 기억의 상실은 우리의 자아를 파괴하며 나아가 과거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저마다 처한 상황에서 살아남고자 배운 바를 공유하며 이를 토대로 기억을 전승시켜 문화를 구축했다. 이러한 전통문화의 소멸은 생존의 불능을 의미한다.
기억을 자신 안에 가둘 때 그것은 상처가 된다. 이를 사회의 기억으로 환원하고 공유 기억으로 재생할 때 인간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의 역할’에 대해 비로소 성찰할 기회를 가진다. 인간이 인간을 소멸시키는 전쟁을 영원히 기억하며 후대에 되풀이해서는 안 될 공유 기억으로 구축한다.
집단과 그 집단의 정체성은 이러한 다양한 생태환경에 따른 최적의 경험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다. 생물의 다양성 확보가 생존에 필수요건이듯 문화의 다양성 또한 인류 생존의 근간이다. 기록은 생존의 근간인 다양성 확보의 시작이다. 기록으로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기반으로 또 다른 인간이 꿈을 꾸며 어떤 인간은 그 꿈을 종내에 실현한다.
“쓰면 느려지고 느리면 분명해진다. 손으로 쓰면서 우린 그렇게 알게 된다. 내가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 (베른하르트 뢰스너, Bernhard M. Rosner)
기록되는 삶으로 우리는 다시 존재한다. 개인의 기록이 사회의 기록이 되고 사회의 기록은 다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마침내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는 새로운 기록을 만들며 우리네 삶은 더 강건해질 것이다.
평화를 품은 집은 평화를 배우고 휴식을 취하며 자연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자 휴전하고 있음을 가장 절박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삶의 속도를 늦추는 일, 휴식을 취하는 일, 정신적 물리적 여유를 확보하는 일은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기록은 공개되고 재해석되고 재창조되기 위해서라도 기록 생산자의 품을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기록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은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공간이 아카이브 전시장이 되어야 한다. 공공기록을 주로 다루는 기록관이 있지만 그와 별도로 언제 어디서나 기록 전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과거로부터 와서 미래로 가기 때문이다.
겪은 일을 진솔하게 쓴 후 기록물을 아카이브하는 일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일 뿐만 아니라 세대 간 교류이며 역사적 사료이자 창작의 원천이다. 스스로를 만드는 일은 오늘을 기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음미하고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면 만들어진 기록들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나’에 의해 재해석되지 않는 기록은 남의 삶이다. 활용되지 않는 기록들은 가치가 없다. 디지털 기기로 삶의 모든 것을 기록하려는 마음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기록이 과시나 소비가 아닌지 경계하고 살핀다.
기록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자기 고민의 시간이 빚어내는 생산물이다. 스스로 내면을 찬찬히 깊게 들여다보며 ‘나’의 기록을 생산해야 한다.
예로부터 수많은 기록 중에서 채택되고 보존되어 대대로 이어지려면 창조적 예술작품이어야 했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아름다운 체스판, 찻잔 받침대, 머그잔의 그림들, 스코틀랜드의 체크무늬 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기프트숍은 또 다른 아카이브 현장이다. 기록이 예술이 되고 상품으로 만들어져 선물이 된다. 선물은 기억의 전달 장치 역할을 한다.
기록은 저마다 다른 사람의 삶이 담겼을 때 가치를 가진다.
기록이 목소리를 가지되 그 소리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왜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내러티(Narrative)가 있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이 기록물의 현재를 보장해 줄 것이다. 자료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목소리 중에서 반드시 전승해야 할 것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기록에 대한 재해석과 재창조의 여지를 열어두어야 한다.
인간은 사는 내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이야기꾼이다. 기록물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다음 사람에게 재해석과 재창조의 기회를 기꺼이 열어두는 아카이브는 이런 이야기꾼들이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기록을 근간으로 인간의 무한한 상상이 이어진다. 이것이 우리에게 아카이브가 필요한 이유다.
기록은 삶을 느리게 하고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들여다보게 한다. 삶의 속도가 영혼의 속도에 맞출 시간을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