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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후기/책 2024. 10. 5. 16:57
여느 심리학 관련 조언서가 그렇듯, 이 책에서도 결과적으로는 ‘판단과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며 어떤 현상을 두고 크게 의미 부여하기보다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을 강조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느끼는 차별성 중 하나는, 관계에 대한 타산(좋은 기억에 대한 평균율, 서로에 대한 필요성 등.)이다. 흔히들 내가 손해 보는 느낌,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받아도 막상 손해 득실을 따지려는 시도는 어쩐지 속물근성과 같다는 이유로 거부감이 들기 십상이니까.
물론 기억은 희석되고 왜곡되기 마련이라 철저하게 객관적인 결론은 어렵겠지만. 불편한 관계의 개선이 스스로의 몫이라는 점에서 이성적인 평균치의 타산과 그에 따른 결단은 내게도 상대에게도 안전한 조치인 것이다.
그런고로 ‘항상 가학과 착취의 관계는 착취당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제동이 걸린다.’라는 저자의 의견에 아주 동의할 순 없지만, 상호 성과 쌍방향성이라는 관계의 속성상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모쪼록 변화란 두드려야 문이 열리고 깨뜨려야 알에서 나올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차별성을 꼽자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이다. 읽다 보면 <미움받을 용기>에 은근한 반감을 피력하는 뉘앙스가 종종 느껴지곤 하지만, 모쪼록 이와는 별개로 ‘다시 사랑할 수 있는’이라는 표현 자체로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음 도약을 위한 발판을 삼으라는 위로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잃지 않는 법. 잠재라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감정을 통해 관계의 진정성을 되짚고 끝을 향해 치닫는 관계라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게 제때 마무리를 짓는 법. 또한 적재적소에 상대를 존중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 말처럼 쉽진 않지만 관계는 일상이자 실전인 만큼 용기를 낸다,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 키워드: 감정, 관계, 벗어남.
- 한 줄 평: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기 위한 현실적인 관계 조언서.
감정이 솟구칠 때 결단을 내리기보다 ‘내 딴에는 고심해서 내린 결정이야.’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용당한 사건’과 함께 ‘이용당하지 않은 나머지 시간’에 대해서도 떠올려보자. 지금 일어난 사건 말고 그동안 함께한 ‘관계의 질’, 그것의 평균을 내보는 것이다. 의미 있는 시간이 많았다면 상대에게 솔직한 감정을 말하는 선에서 그치고, 좋은 기억이 없더라는 결론에 이르면 그때 가서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행동을 취해도 늦지 않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이것은 본능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나의 소망이나 욕구만큼 누군가의 소망도 존중해야 ‘건강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자신이 어디에, 누구와, 왜 있는지도 모른 채 있다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 현실은 판타지를 실험하는 무대가 아닐뿐더러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타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현실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행위임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가 시간을 내주는 것을 아까워한다면 굳이 그 인연에 매달리지 마라. 오히려 “나는 너의 2시간짜리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단호하게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관계는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받을 것 받고 줄 것 주는 관계가 더 오래가며 편한 사이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은 교감과 상호성을 기대했는데 상대는 자기 필요만 원한다면? 그때는 점검의 시간을 가지자… 지향하는 바가 다른데 굳이 맞춰줄 필요는 없다. 인생은 좋은 사람을 붙잡지 못하는 것보다 보내야 할 사람을 ‘제때’ 보내지 못할 때 더 크게 훼손되는 법이다.
나의 필요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 필요에 맞게 비용과 시간을 적절히 들여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보호다… 생각보다 자신을 지키는 데는 큰 용기와 세밀한 전략이 요구된다. 그러나 한 번 제대로 해두면 같은 이슈로 스트레스받은 일이 없어질 것이다.
‘건강하게 다투는 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싸움은 가면을 벗고 ‘날것의 욕구’를 그대로 드러내도록 도와준다… 감정적으로 제어하지 못하는 분노라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관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서로의 욕구가 분출되는 다툼의 시간도 필요하다.
현재의 관계가 과거 ‘이루지 못한 어떤 관계’를 관성에 따라 복사하거나 반복한 것인지, 아니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대상을 일부러 골라 실패를 반복함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관계로 가는 모든 길을 원천 봉쇄하는 중인지 가려낼 필요가 있다.
관계를 만들어갈 때 자칫 공을 잘못 들여 ‘공든 탑이 무너지는’ 꼴을 본다. 이때는 과감하게 ‘잘못된 공이었으니 무너지기 잘했다’라고 생각하는 게 낫다. 그래야만 그 뒤에 제대로 공을 쌓을 기회와 시간을 얻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내 삶으로 들어오게 할 것인가? 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로 뛰어들 것인가? 이것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배신은 아프고 싫은 것이지만 배신이 나를 죽이지는 못한다. 그저 아주 작은 관계의 실패일 뿐이다.
아프더라도 직시해야 한다. 지나온 관계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감정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상대가 왜 그랬을까 연구하기를 멈추고, 영영 멀어져 버린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초점을 두는 일이다. 질문을 다음으로 바꿔야 한다. “도대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서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가?”… 진짜 원인을 외면하면 ‘대상이 달라지더라도’ 같은 비극은 반복된다. 그러니 섣불리 남 탓, 내 탓을 하지 말고 둘 사이에 머무르자. ‘나와 너’ 사이에 머물러야만 우리 사이게 왜 이렇게 힘들어졌는지 진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관계의 속성 중 하나가 쌍방향성이다. 관계가 ‘있다’ 혹은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엇비슷해야 한다. 꼭 반반이 아니어도 60 대 40, 70 대 30 정도는 되어야 쌍방향 관계라 할 수 있다… 내가 만든 환상과 기대치에 상대가 부응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지질하다, 못났다 비난하며 움츠러들 필요도 없다. 그냥 ‘나도 누군가를 그토록 좋아할 수 있었구나.’ 정도만 인정하면 된다. 마음이 흐르는 방향은 내 탓도 상대 탓도 아니다. 이런 깨달음만 얻고 넘어가자.
정말 믿었던 사람이 나를 떠나려 할 때, 손을 놓을 권리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촉을 감지한 내 쪽에서 먼저 손을 놓을 수도 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을 향하는 관계는 결국 끝에 닿을 수밖에 없다.
미움을 받아 생긴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은 더 많은 미움을 받아도 좋을 맷집을 키우는 게 아니다… 관계에 있어 마지막 감정은 전부이자 모든 것이다. 마지막 감정을 어떻게 새기고 정리하느냐는 이미 정리된 관계는 물론, 새롭게 다가올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관계 설정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을 존중하게 될 때 내 마음과 시간 역시 허무하지 않게 된다…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다. 상처받은 후에도, 관계의 어그러짐을 겪고 나서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다…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여지, 그 ‘싹’을 보존하고 키울 때 나는 과거의 망가진 관계에도 불구하고 건재할 수 있고 다시 내가 원하는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별이 아름다운 이유는 별 자체에 있다기보다 ‘별과 별의 간격’에 있다고 믿는다. 이 간격으로 인해 ‘별의 단독성’이 확보됨은 물론, 별빛에 가려지지 않고 온전히 발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관계도 그렇다…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다’라고 하는 무경계에서 벗어나자. 그렇게 되면 아무도 빛을 낼 수 없게 된다.
자기 몫에 맞는 짐을 짊어지는 것, 이것이 가족의 진정한 의미이며 화목으로 가는 최우선 조건이다.
묻는 것은 상대에게 몸을 기울이는 것이며 가까워지기 위한 시작이다. 몸을 기울이지 않고 곧추세운 상태에서 친밀해진다는 것은 모순이다… 관계의 출발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질문이다. 질문을 하려면 제일 먼저 바라봐야 한다. 보고 궁금해하는 것, 그래서 다가서고 알려고 하는 것. 여기에 물리적인 거리가 더해지고 시간이 쌓여서 버무려질 때 관계가 점차 무르익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가 서로를 ‘그것’이 아닌 ‘너와 나’로 바라볼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나를 살리는 좋은 관계는 가져가고, 나를 아프게 하고 주저앉게 하고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관계는 접는 것이 맞다.
‘나는 눈앞의 친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만약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붙들고 있는 건 순전히 자기 욕심이다… 친구의 달라진 모습이 담담히 받아들여지고, 변화하고 발전하는 친구 모습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될 때 그때 또 너와 나는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를 발견했을 때 내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을 성숙하게 다루지 못하면, 그 감정은 사람을 뿌리부터 힘들게 하고 급기야는 파괴적으로 만든다.
서른 즈음부터 인생의 길이 극명하게 갈린다. 서른 즈음에 정체기를 맞아 성장이 멈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쌓아 올린 것을 밑거름 삼아 성장을 지속하는 사람도 있다… 성가시고 불편한 ‘부러움이라는 덤불’을 인내심을 갖고 좇아가면 자신의 욕구와 필요에 더 솔직해지는 길이 열린다.
누군가 종로에서 뺨을 맞고 와서 당신에게 푸는 것 같으면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라. 굳이 싸울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그 화를 뒤집어쓸 이유도 없다.
진짜 관계는 유익을 논하지 않는다. 요구하지 않는다. ‘함께 존재하는 강한 유대 감정’을 바탕으로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소통한다… 관계 유지에는 에너지가 든다. 그렇지만 힘들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재미’와 ‘즐거움’이 있다. 상대방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염려하고 걱정하며 나눌 뿐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기꺼이 협력한다… 관계 맺고 있는 사람에게 힘든 일, 어려운 일, 문제가 생겼을 때 관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이 떠오르는지를 보면 관계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진짜 배려는 사람을 골라가면서 하지 않는다.
진짜 관계는 완벽함에 있지 않다. ‘좋고 싫음’, ‘서로 다른 의견들’이 공존하고 충돌이 허용되는 것이 진짜 관계다.
진정한 관계에서는 수직적 보고가 없다. 공유한다… 진정한 관계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공유해야 한다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나누고픈,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과의 문제를 풀고 싶다면, 그에 앞서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탄탄해야 마음도 잡히고 보일 것도 보인다… 누가 봐도 뒤틀린 관계임에도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안에 ‘나의 욕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유지할 때 얻을 이익과 손실에 대해 적어라. 손실이 이익보다 눈에 띄게 크다면 오랜 관계에 변화를 일으킬 때가 된 것이다. 이 계산이 끝나야 비로소 ‘벗어날 용기’라도 내볼 수 있다.
감정이란 수용하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책임이나 잘잘못도 없다. 다만 감정에 수반되는 행동을 결정할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타협은 타인하고만 하는 게 아니다. 상이한 욕구, 상이한 마음을 가진 자신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감옥에 가둔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어쩌면 우리가 관계를 통해 이르고 싶은 궁극적인 목표는 같은 것일지 모른다. 각자의 속도가 떠하든, 결국 자신의 인연의 바구니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담기게 될 것이다.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 치부를 드러내도 괜찮을 거라는 신뢰를 주는 사람,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 말이다. 우리가 이토록 관계로 인해 힘들어하고 복닥거리며 사는 것은 각자 자신만의 바구니에 담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며 각자의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조금씩 배려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공감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오늘은 내 이야기 좀 들어주면 안 돼?” 이 말에 단호하게 거절은 못 하더라도 선을 긋는 정도는 해야 된다.
특정인의 감정을 받느라 힘이 든다면 무 자르듯 50 대 50까지는 아니어도 엇비슷하게 주고받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상대가 편파적인 점유율을 가져간다면 당연히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관계를 끊지 않더라도 공정성을 바로잡는 시도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랑도 그렇지만 모든 관계가 타이밍이다. 그리고 이 타이밍은 자신의 욕구를 들어주는 데도 중요하다. 이기적으로 자기 요구만 관철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터질 내 목소리를 ‘적시’에 들어주고, 그런 후 상대의 불편한 감정을 헤아리라는 뜻이다. 요구를 들어주는 순서만 바꿔도 숨통이 트인다. 내 욕구가 적절히 해결되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 타인에게도 진심으로 잘할 수가 있다.
본인이 불안하거나 불편한 상태라면 피해야 한다.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뒤로 미루는 것이 안전하다.
말하는 태도와 수위를 미리 결정해 놓자. 예상 대본이 필요하다. 이때 상대의 반응, 내 말에 대한 답변, 내가 속마음을 꺼냈을 때의 분위기 등을 시뮬레이션해 보자.
관계가 파괴 양상으로 치달을 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관계는 주고받음이다. 쌍방향이다. 내가 있고 네가 있는 것이다. 그 균형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이별을 고할 수 있다.
시행되고 반복하는 것도 중요하나 적절한 시점에서 정리하고 끝내는 일이 더 중요해요. 특히 이 과정에서 얻은 것과 착오에 대해 요약,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해요. 좌절만 하고 지나치면 아무런 성장도 이룰 수 없어요.
자기 필요를 올곧이 인정하는 법,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 됨을 유지하는 법,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법, 관계에서 존엄성을 잃지 않는 법, 나와 타인의 가치를 파괴하지 않는 법, 정글 같은 사회에서 이용만을 목적으로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 바로 그런 것을 알아야 한다… 나를 지키고 결과적으로 너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상론이 아닌 현실론, 즉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1. 자기 필요에 대한 자각: 나는 관계에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2. 나의 필요를 중심으로 한 나와 타인의 관계성: 지금 마주하는 상대는 그런 나의 필요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가?
3. 타인을 인격적 존재로 인식하는 나의 수준: 나는 그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인지하는가?
4. 나의 필요 때문에 타인에게 접근할 때 나의 태도: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태도로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가?
5. 타인의 결정과 그에 대한 나의 반응: 그 사람의 결정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6. 필요와 도움의 경계에 대한 질문: 어디까지 도울 것인지 서로 얘기가 되었는가?
7. 필요를 위한 관계적 상호작용 이후 나의 반응: 나는 상대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하는가?나는 내 부탁에 대한 상대의 답변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상대가 호의를 갖고 나에게 필요를 제공하는 건지, 다른 목적을 갖고 미끼를 제공하는 건지는 스스로 분별해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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