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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0년 만에 다시 보니 많은 내용이 새롭게 보인다. 사실 전부 기억나는 내용이 몇 없기 때문이겠지만 <황혼들의 반란>에서 프레드의 마지막 장면만은 정확히 떠올렸다.
‘어떤 가정에 대해 극단까지 몰아가는 설정’,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구, 근미래, 시공간의 초월,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는 인간을 내려다보며 장난감처럼 농락하는 미지의 존재 등 베르베르만의 SF를 총망라한 <나무>는 비교적 간결한 문체임에도 극이 고조될수록 생생한 긴박감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지하고 한낱 미물인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며 군림하려는 모순을 인간 외의 존재의 시선을 빌어 비판하고 풍자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아주 저버리지는 않는다. 폭력성과 전쟁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면서 평화를 지향하는 희망적인 소통의 여지가 늘 일관적이다.
철학적이고도 과학적인 관점으로 인간을 탐구하면서 때로는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리만큼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로 드러나는 ‘증’의 시선과, 전쟁이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과 가능성을 가지고 소통을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애’의 시선이 늘 공존한다.
결국 <나무> 표지의 나무는 <가능성의 나무>, <말 없는 친구>에서 등장하는 각각의 나무는 소통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본문에서의 각각의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이어져있는 <나무>, 일명 ‘베르베르 유니버스’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무>가 출간될 당시에 비해 성인지 감수성이 변화된 만큼 여성을 특정한 편협적인 서술과 특정 신체 부위를 필요 이상으로 부각한 묘사가 불편했다. 남성은 외관에 집착하고 넘치는 욕정이 특질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면 그건 그대로 진부하다. 10년 전에 처음 <나무>를 읽었던 중학생 시절엔 대강 넘겨짚던 부분도 이제는 다시 보이니 지난 10년의 간극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삽화는 프랑스어 판과 달리 한국어 판에 프랑스 최고의 만화가 뫼비우스가 그린 30여 컷의 컬러 삽화가 실려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뫼비우스는 유명한 장 지로드라는 만화가로, <에일리언(1989)>, <제5원소(1997)> 등 수많은 SF 영화의 디자인 및 콘셉트 아트와 디자인을 담당한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한다.
장 지로드라는 이름으로 미국 대중문화를 적극 수용한 사실주의적 배경의 만화를 그렸다면, 뫼비우스라는 이름으로는 독특하고 전위적인 이미지 실험을 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오토모 카츠히로, 타니구치 지로, 미야자키 하야오 등 일본 만화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한다. 화가의 주장르가 SF여서인지 소설과 아주 찰떡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나무>와 <파피용>의 표지는 읽어보고 싶게끔 눈길을 끈다.
그러나 종종 서술상의 묘사와 생김새가 아예 다르거나 생략되는 경우, 또는, 오히려 반대로 특정 단서가 삽화로 쉽게 유추되어 스토리의 몰입이 깨지는 장면이 있어 다소 아쉽다.- 키워드: 공상과학, 인간탐구, 자유
- 한줄평: 인간 외의 존재의 시선을 빌어 탐구하는 인간을 향한 애증의 공존과, 공상과학에서의 자유로운 사색.
<내겐 너무 좋은 세상>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에게 진정 영혼이 있는가?”
“지구상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야. 우리는 모두 기계야.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환상을 품도록 우리 뇌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야.”
가전뿐만 아니라 각종 살림 도구들이 나를 대신해서 일사불란하게 집안일을 해준다라. 가사와 사 남매 육아에 지쳐 있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부럽고 매력적이었다! 특히나 1인 가구와 고령화가 한창 증가세인 현 시국에서 독거노인 한정으로라도 보급화가 시급한 시스템이 아닐까?
물론 모든 살림살이가 뤽한테처럼 하루 종일 말을 걸고 자발적으로 들이댄다면 부담스러울 것이다. 뤽은 그런 안락한 일상에 싫증을 냈지만, 강도가 찾아들어 ‘사람 흉내를 내는 혐오스러운 물건들’을 모조리 도난당하고 나서야 물건들이 감정과 영혼이 깃든 것 같단 느낌마저 갖는다.
강도를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지만 분노보다 앞서 사랑을 느낀 뤽에게 도리어 강도가 꿈에서 깨어나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애잔하면서도 웃지 못할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첫 번째 삽화의 뤽과 두 번째 삽화의 뤽이 다르게 그려진 데에 일부러 의도적인 장치라면 그 이유는 왠지 납득이 될 것도 같다. 우리 인간은 문명을 일궈낸 이기의 번영에 도취되어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고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지만, 실상은 자신 안의 본질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마주할 엄두조차 없는 한낱 어리석은 미물에 불과한 존재다.<바캉스>
시간 여행 전문 여행사에서 주인공 피에르에게 과거로의 여행에 대한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21)>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미드나잇 인 파리>
마침 <미드나잇 인 파리> 역시 프랑스라는 점과 타임슬립에 관한 내용이어선지 자연스레 연관됐다(심지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한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우디 앨런이 이걸 읽고 만든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물론 피에르는 과거에 가서 살겠다는 것이 아닌 그저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특별한 경험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 피에르가 가진 황금시대에 대한 환상은 여행을 통해 산산이 부서졌다. 하긴 여행하는 시대가 과거여도 피에르의 입장에선 ‘진행 중인 현재’이니 불만일 수밖에 없겠다.
작가는 이번 에피소드를 작성하면서 피에르가 여행하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많은 조사를 했겠지만, 직접 작가가 양자 역학적인 교차점을 만드는 기계로 그 시대로 시간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묘사가 사실적이다.
여하튼 이번 에피소드를 삶에 적용하여 드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자면 이렇다,- 과거에 불편한 진실은 희미해지고 번영을 누리던 좋은 기억들만 남아 황금시절로 포장되기 마련이다.
- 현재에 처한 상황은 미래에서 돌아보기 전까지 언제나 불만스럽다.
- 성수기든 비수기든 여행엔 돈이 많이 든다. 그래도 여행자 보험은 필수다.
투명 피부
사람들은 누가 폭력을 당하는 광경은 견뎌내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은 참지 못한다.
진실보다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특히 그 진실이 우리의 몸과 같은 개인적인 요소와 관계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해서 별로 잘 알지 못하며 진정으로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의 기계 장치처럼 생각하기 일쑤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싶어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변화는 두렵지 않아요. 정체와 거짓이 훨씬 더 나쁘죠.”
보편적임을 벗어난 다름, 특히나 그것이 진실로써는 받아들이지는 못하면서 두려워하거나, 기피하거나, 혐오하는 등 인정하지는 못하면서 유희거리로는 즐긴다는 부조리함. 그런 과정 속에서도 투명한 ‘나’를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곡예사를 통해서 절망적으로만 서술되진 않았다.
‘나’에게 처음 손을 내민 예쁘고 상냥한 공중 그네 곡예사가 구체적으로 ‘한국’여자라고 밝힌 점이 새삼스러웠다. 보통 해외 작가는 동양문화권의 인물을 묘사할 때 기껏해야 아시아, 구체적이어봤자 중국 또는 내지는 일본이 주로 등장하는데, 콕 집어 ‘한국’이라고 가리켜서 신기했다(전 세계적으로 베르베르가 퍄 1500만 부 중 3분의 1이 한국에서 팔린 데에 대한 팬서비스란 설이 있다.).<냄새>
<트루먼 쇼>에서 시청자들이 트루먼을 지켜보듯, 인간이 지각하지 못하는 미지의 고등 존재가 내려다보는 인간은 고작 ‘진주조개보다 진주를 더 잘만 들 줄 아는 아주 작은 동물’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 ‘우주의 똥’이 ‘진주’로 거듭나기까지 일궈 낸 인간의 지성과 기술과 집념(?)은 우주의 또 다른 차원에서조차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을 만한 가치는 있던 모양이다.<황혼의 반란>
“노인 하나가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무> 중에서 가장 좋아하면서도 너무 현실적이어서 서글픈 에피소드다.
작가가 양로원을 방문한 뒤에 쓴 작품으로 ‘닫힌 세계’를 통해 현대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무대로 활용되었다는 말에도 알 수 있듯이, 젊은이가 노인이 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부정하는 모습은 이 소설이 쓰인 지 이미 10년도 더 지난 현재 우리나라의 실상을 거울처럼 낱낱이 비춰준다.
일부 몰상식한 이들의 언행에 대한 비난이 도를 넘어서 ‘틀딱충’, ‘노슬아치’와 과 같은 노인 혐오의 의미를 내포한 신조어(비단 노인뿐 아니라 연령이나 성별 등이 공통된 특정 집단을 벌레(-충)에 싸잡아 빗대어 분류되는 현상이 증가하는 추세다.)가 아무렇지 않게 일상에서 사용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나이만 든다고 어른인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그들이 청춘을 바쳐 사회와 경제 발전에 기여한 덕에 지금의 젊은 세대가 안위를 누릴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그들 세대가 존경받아 마땅함은 분명하다.
초고령화 사회가 불가피한 이 시국에서, 분명 젊은 세대 또한 부양에 대한 부담과 취업난이라는 나름의 고충이 있다. 쉴 새 없이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관습처럼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사고방식을 비록 어렵더라도 노인 세대에겐 노련한 이해와 유연하게 사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 역시 막연한 선입견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이며, 국가 차원으로도 세대 간의 소통과 교류의 기회의 장을 자주 마련하고 확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힘없고 절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연륜을 발휘하여 맞서 싸우는 노인들의 모습은 무척 감명 깊다. 자신의 자식들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애써 현실을 부정하던 프레드가 도리어 버스를 탈취하고 저항 조직을 구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반란의 수장이 되어 활동하는 과정은 더욱 극적이다. 또한, 한 명의 노인을 도서관에 비유한 데서 작가의 노인을 향한 애정과 존경이 느껴진다.<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어이없는 역설이다. 우리 서커스단에 있는 인간들이 우리 모습을 닮으려고 분장하거나 우리 몸짓을 흉내 내려고 애쓰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그것은 더더욱 역설이다.
이 소설의 몇몇 요소는 당시 초고 상태에 있는 <인간은 우리의 친구>라는 작가가 쓴 희곡 작품의 소재라고도 한다. 작품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인간이 타 종족으로부터 실험용 쥐, 애완동물, 야생 쥐로 묘사됐고 이 글을 쓴 작가나 읽는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론에서 ‘인류에 대한 외래적 시선’의 기법을 사용하는 이유로 ‘인간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기에 언제나 유익하고 흥미로운 일’이라는 작가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기도 어렵다. 초월의 존재가 인간을 관찰하면 이렇게나 단편적으로 보이겠다는 생각에 흥미롭고도 씁쓸했다.
또한 실험에 초점을 두다 보니 ‘우리’라는 존재에 대한 크기가 도무지 가늠이 안 되곤 한다. 인간을 간단히 표본병에 집어넣어 관찰할 정도면 돋보기가 아니라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할 만큼 어마어마한 존재가 고작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설치한 덫에 걸릴 수 있나? 싶은데 이 역시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의문이 드는 것 같다.
마지막에는 (당시 표현으로) 애완동물을 무책임하게 데려와놓고 유기하는 모습에 대한 풍자 어린 비판이 느껴졌는데, 확실히 책에 나올 당시보다 현재에는 동물 보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작중에 애완 인간에게 먹이를 주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피스타치오 공급기를 장만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왜 하필 피스타치오일까.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인간은 못 먹을 텐데 말이다. 이 또한 당시 애완동물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단순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거나 내지는 재미로만 키우려는 무책임한 인간을 비판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미지의 존재가 아무리 실험하고 관찰함에도 인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 대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목처럼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은 미지의 존재뿐 아니라, 동물을 유희거리가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여겨야 할 우리 인간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여담으로, 바로 그 뒤에 나오는 ‘우리가 먹는 글라프나우에트를 물에 적셔서 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라는 대목에 이 글라프나우에트는 <냄새>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외계인(?) 보석상의 이름과 동일하다. 주석도 따로 없고 작가가 창조해 낸 존재인 줄로만 알고 있다가 혼란스러워서 구글에 검색을 해봤는지만 역시나 따로 나오는 바가 없다.
하여간 이 두 가지의 의미가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작가의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조종>
우리는 어떤 것이 없어서 아쉬움을 느낄 때라야 비로소 그것이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익숙한 것의 소중함이란 점에서 <내겐 너무 좋은 세상>, <바캉스>와 맥락이 이어지는 것 같다. 특히 왼손과 계약하는 장면에서 왼손의 기능에 대해 사실적이고 과학적으로 상세히 서술함으로써, 왼손이라는 특정 부위뿐 아니라 우리 몸의 모든 부위가 나라는 존재에게 헌신하는 중요한 동맹군이다.
전혀 결이 다르지만 손이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일본 만화 <기생수>가 떠올랐는데, 나중에 위키백과를 통해 보니 그보다는 ‘외계인손 증후군(한 손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여 마치 손 자체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혹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그렇지 주인공 프티롤랭의 직업이 형사이든 뭐든, 프티롤랭 본인이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고 의지를 가진 왼손이 제멋대로 저질렀든지 간에 증거에 증인까지 자명함에도 어떻게 절도죄나 살인죄로 구속되는 게 아닌 사무소를 차렸을지 궁금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성추행 혐의도 추가된다.
살인 사건 수사 중에 프티롤랭이 자기 왼손을 붙잡고 쇠자로 제 왼손을 때려가며 신문하는 장면은 코미디가 따로 없다. 얼떨결에 우리 경찰의 신체적 가혹 행위가 더러는 불가피함을 폭로한다(경찰 독자를 의식한 작가의 수습일까?).
도중에 의사가 희귀병이라 진단을 내리고 동료들에게 소개해서 논문을 쓰고 싶어 했다는 대목은 있으니, 작중에 드러나있진 않아도 프티롤랭의 에이전시는 심신 미약으로 감형을 받아 출소한 뒤에 차렸다고 보면 되려나.
이야기는 프티롤랭의 왼손이 오른손과 협력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프티롤랭은 타인의 입안에 있는 ‘시기심 많은 못된 혀’가 당연히 자신과 자신의 왼손을 시샘한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이를 통해, 왼손이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로 납득할 수 없던 프티롤랭은 왼손과 계약한 이후엔 모든 신체기관은 저마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종>보다는 차라리 <협력>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 제목이지 않을까 싶다.<가능성의 나무>
1인칭 시점의 ‘나’라는 화자가 있어서 그런지 자전적인 느낌이 강했다. 이 책의 프랑스어판 제목이기도 한 이번 에피소드는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작가가 컴퓨터와 체스를 두어 패배한 뒤에 떠오른 생각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인간 사회의 미래에 대한 가정을 내다보는 것을 주로 체스 게임에 빗대어 표현했다.
내용 전반적으로 작가 본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미래의 행복에 대한 염원을 직접적으로 투영시킨듯했다. 이번 에피소드는 읽는 내내 일정 부분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소리 없는 외침이자 현실성 없는 유토피아 같았다.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뿌리 깊이 내리고 자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현재 너머 다음 세대까지 멀리 내다본다.
갈무리쯤에, ‘내 상상력을 자극하여 빚어낸 생각’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 뒤 또 다른 영감을 얻으려 애쓸 것이란 대목에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화자 ‘나’의 의지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의지 또한 느껴졌다.<수의 신비>
우리는 줄에 메이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 공인된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저 자유롭다는 것만으로도 자격은 충분하다. 무릇 학문이란 자유의 행위여야 한다… 미리 짜놓은 틀이나 숭배의 대상이나 지배자나 선입견에 속박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유, 그런 자유가 보장될 때 학문은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수에 한계가 없듯이 생각에도 속박이 없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한 싸움에서는 천장을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바닥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작가가 반에서 열까지 셀 줄 아는 아이들과 큰 수를 셀 줄 아는 아이들 사이에 서열이 존재한다는 그의 어린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착상된 소설로 도시국가, 신전, 신관, 기사라는 단어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에피소드다.
수에 관한 철학을 이야기하다가, 수에 사로잡혀 역사를 등한시하는 사회를 풍자하다가, 지식에 대한 은유를 둔 정치와 학문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인 듯하더니, 무지에 사로잡혀 한 치 앞도 분별하지 못하는 맹신을 풍자하다가, 사고의 유연성으로 일구는 성장에 대해 나오는데… 뜬금없이 과학자를 비판한다고? 뱅상을 속박하려 든 건 과학자가 아니라 대신관과 그의 추종자들의 국가(‘10의 수호자들’)가 아니었나?
또한 개인적으로 내가 네 아이를 둔 엄마여서 그런지 몰라도(물론 시대적 배경이 가상 고대긴 하지만), 뱅상에게는 신관 시절에 이미 12까지 아는 처와 5까지 아는 자식들과 10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가 있었다. 아내와 자식들의 정신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면서 수의 비밀을 알게 되자마자 파르밀에 가서는 카트린 공주한테 수의 비밀을 알려주고 새살림을 차린 이후로 이전 가족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다.
단편인 만큼 주인공인 뱅상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가족들에 대한 서사까지 다 나올 수는 없다지만, 뱅상에게 식구들의 존재란 그저 대를 잇기 위한 수단인가, 아니면 그저 통상적인 관습을 따랐을 뿐인가? 자신의 지적 추구 때문에 철륜을 저버리고서는 다른 도시국가의 공주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이단의 지도가 됐다는 게 나로서는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설마 ‘뱅상은 수에 한계가 없듯이 생각에도 속박이 없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라는 말의 의미는 학문과 생각에도 자유가 있어야 하듯 결혼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대목의 의미일까? 아니면 기존의 신관의 신분에서 이단이 되어버렸으니 빠른 시일 내에 상승혼이 목적이었을까?
여하튼 이 에피소드는 표면상으로는 무지에 대한 일갈만이 그려진 듯하지만, 교육 이전에 견고한 믿음의 기반이 주는 중요성에 대해서 뱅상에게도 적용됨이 드러나있다고 생각한다.
베르베르의 서사는 대체로 장황하기보다 담백하게 흘러가지만 특히 마지막일수록 대사가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다. 이렇듯 작가만의 문체가 분명하면서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는 결말을 개인적으론 선호하는 편이다.<완전한 은둔자>
“네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러했다. 네가 하는 일은 그저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배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심오함보다는 여러모로 비위가 상하는 내용이었다(작중에 ‘구토증을 느꼈다.’ 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육신의 굴레에서의 해방이라는 발상 자체가 표면적으로도 너무 극단적이고 엽기적이고,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주변에 아무도 없이 자신의 정신을 홀로 탐사한다는 묘사가 어쩌면 그의 다른 소설 <타나토노트>와 비슷한 맥락일 텐데도, 유독 이번 에피소드는 가족들과 뇌만 남겼다는 설정 탓인지 더욱 거부감이 든다.
어쨌든 작가의 기괴하리만큼 정신에 대한 탐구와 상상력은 기발하고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왜? 이런 사람이 가족은 대체 왜 만들었을까? 시간적 장치 때문에 굳이 설정된 건지 모르겠지만 처자식은 대체 무슨 죄인가. 그놈의 ‘개척자 다운 면모’때문에 남은 가족들은 버려지고 자식들의 부양은 오롯이 부인의 몫이다. 내가 누군가의 딸이고, 아내이고, 엄마인지라 어쩔 수 없이 자꾸 주인공 외의 주변인들에 이입하게 된다. 차라리 가정을 꾸리지 말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던가, 남은 가족은 도대체 무슨 죄인가.
특히 귀스타브의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영양액에 담가진 아빠(라고 하는 뇌)에게 중얼거리는 모습은 너무 짠했다. 아무리 혼자 사는 인생이라지만 심지어 그의 처자식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아주 가끔씩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탐구에만 심취해 있었다는 게 보면 볼수록 화가 난다.
앞서 학문에 심취하여 본 가정을 내팽개친 뱅상만큼이나 최악이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갈증, 발상의 자유에 이어 무책임한 가장이라는 점에서 <수의 신비>와 일맥상통한다.
작가조차도 그렇게 느꼈는지 뱅상도 그랬듯 귀스타브도 그리 곱게 보내지는 않는다. 많은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든 귀스타브의 아들이 아빠(의 뇌)를 없애버리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귀스타브(의 뇌)는 그의 자식들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아 고조손대까지 명상에 잠기게 되는데, 그때까지 그의 후손들이 대단히 귀찮고 역겨웠을 그 뇌를 조상이라는 이유로 그 세대에까지 꾸준히 관리해 줬다는 점이 경이로울 정도다.<취급 주의: 부서지기 쉬움>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냄새>와 같은 맥락의 내용으로, 앞서 말했듯이 삽화로 스포 당한, 더 정확히는 강제로 복선 당한 에피소드다.
그리고 아빠가 과연 광고는 제대로 보기나 하고 구매를 결정했나 싶을 정도로 이 ‘꼬마 조물주’는 매력적이면서도 장난감으로는 너무 난잡해 보인다. 연령대의 문제가 아니라 지능지수가 평균 이상은 돼야 장난감으로서 기능하지 않을까 싶다(심지어 창고에 처박힐 때는 아빠조차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말이다). 장난감에 대한 묘사가 흥미진진한데 비해 결말이 너무 썩둑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다소 아쉬웠다.
경이롭고 복잡다단한 새로운 우주와 생명체의 탄생이 책임감과는 동떨어지고 흥밋거리에 싫증 내기 쉬운 인간 아동의 장난감이라니! 이 또한 ‘베르베르 유니버스’ 중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번뇌하며 살아가는 삶,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우주가 사실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초월의 존재에게 있어 부서지기 쉬운 장난감에 불과하지 않을까?<달착지근한 전체주의>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베르베르의 다른 소설에서도 특정 사건을 두고 다양한 TV 채널에서 뉴스 보도, 대담 또는 예능 프로그램을 번갈아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형식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단편의 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와 같은 형식으로 무려 100년의 흐름을 보여준다. TV에 대해 ‘인간들이 불나방처럼 홀리는 빛을 내는 상자’(<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라는 식으로 종종 풍자하던 작가가 굳이 이런 형식을 취한 이유는 아마, 제목에 대놓고 <전체주의>를 언급한 것과 미래 사회학의 관점에서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는 것으로 그 의도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TV 방송은 결국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한다는 이 시대에서 획일적인 사고가 확산되게끔 유도하는 매체를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작중에 어느 토크쇼에서도 대놓고 그랬듯 유행과 제도에 맞서 싸우겠다면서, 재미없는 것과 짝퉁은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는 역설을 보이니 말이다.
또한 아제미앙의 소설 자체로도 유전공학 등 과학의 무분별한 발전에 대한 비판(그에 해당되므로)이 있으며, 유행을 주도한 보나시외의 소설에 밀려 극단적인 선택에 이른 비극적인 작가 아제미앙을 보나시외의 후손이 놀라운 혜안을 지닌 예언자라고 추켜세우는 아이러니함으로 위의 풍자로 이해했다.
아제미앙의 과학소설은 결국 보나시외와 그의 후손에 의해 한 세기에 걸쳐 판이하고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세기가 지나고서야 그 진가를 뒤늦게 인정받았어도 살아생전에는 출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을 발하지 못했으니 무슨 소용일까.
대체 보나시외 집안과는 대체 무슨 악연인지, 아제미앙 모자의 비극적 결말이 너무나 짤막하게 언급하고 마는 데 비해 보나시외의 후손마저 아제미앙의 소설로 금전적 이익을 챙기자 괜히 보는 나까지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허깨비의 세계>
짧지만 가장 난해하고 철학적인 이야기여서 여러 차례 재독했던 에피소드다. 고등학교 철학교사인 가브리엘이 겪는 기표와 기의에 관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묘사됐다. 소쉬르가 정의하는 기표와 기의란 기호의 근본을 이루는 두 성분으로, 예를 들어 ‘나무’라는 말이 있을 때 ‘나무’라는 소리는 기표(음운적 요소), 그 말이 나타내는 나무라는 개념이 기의(개념적 요소)가 된다.
그러니까 이 에피소드에서의 가브리엘이 겪고 있는 현상은 기표가 가리키는 기의조차 문자로 대체되는 상황이다.
이번 에피소드가 가브리엘이 겪는 현상에 대해 게슈탈트 붕괴(특정 대상에 과도하게 몰입할 경우 등 대상의 정의나 개념 등을 잊어버리는 현상)와 연관이 있다는 혹자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가브리엘이 벽이 사라진 자리에 손을 내밀었더니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라는 대목에서 가브리엘에게서 ‘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과 인지 자체가 아예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중에 가브리엘이 겪는 현상은 되려 벽이 사라진 자리에 버젓이 벽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문자가 나타났다고 했다. 벽이 사라졌고, 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의 정의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가브리엘이 겪는 현상이 정의나 개념에 대해서 잊어버린 게 아니라, 제목에서처럼 사물이 문자라는 허깨비로 대체된다는 점에서 인지왜곡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사물은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붙일 때 비로소 존재한다.’ 고 가르쳤던 가브리엘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문자를 대체되는 것을 보고 의문을 갖게 된다. 이름이 붙여지기 전의 동물과 사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이 대목이 바로 작가가 가브리엘의 입을 빌려서 독자들에게 묻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라 생각됐다.
인생의 첫 기억(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부분 사고나 인지력이 미숙한 영아기일 것이라는 전제하에)을 어렴풋이 떠오르면 알 수 있듯 내가 ‘그것’을 일컫는 이름을 알기 이전에도 이미 ‘그것’은 존재하고 있다. 이름이란 단지 인간의 인지 과정에서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함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잊힌 본질’이란 점에서 <내겐 너무 좋은 세상>과, 속박된 사고는 해방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은둔자>, <수의 세계>와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라고 이해했다. 이름이라는 기표, 보고 듣는 감각에 의존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규정하는 데에만 치중하느라 생각이 갇혀 본질에까지 닿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사람을 찾습니다>
제목 그대로 구인 광고다. 초반엔 이집트의 여신을 닮았다는 누트가 얼마나 호화롭고 고상한 나날을 보내고 얼마나 고상한지에 대한 소개로 시작해서, 그녀의 이상형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서술되더니 결국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노골적이고도 조롱 섞인 풍자로 끝나지만 유머가 유머로 보이지 않아 썩 유쾌하진 않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표현되는 풍자는 쓴웃음을 짓게 한다면 이번엔 쓴웃음은커녕 코웃음을 치게 된다.
이집트 신화에서 천공의 신이자 망자의 수호신이며, 게브라는 대지의 신과의 사이에서 이시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신을 낳은 어머니 격의 신인 누트를 닮았다는 높은 신분의 ‘그녀’는 이름도 여신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는데, 따로 이집트 신화 속 누트에 대해서 조사해 봤지만 왜 하필 작가는 콕 집어서 누트라고 설정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그녀의 오빠라고 언급된 히포시아스는 나오지도 않는 걸로 보아 작가가 창조한 인물로 추측된다).
초반에는 <바캉스>처럼 이번에도 작가가 시간 여행을 떠나 직접 관찰한 것처럼, 누트의 일상은 마치 고대 이집트의 왕족(특히 포도주에 진주를 녹여 먹는다는 대목은 클레오 파트라가, 이웃나라를 침략한다는 대목에선 )의 하루인 듯 시대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서술됐다가, 그녀의 소일거리를 설명하는 장면은 환상의 동물들에서 등장하면서는 갑자기 현실인지 가상세계인지, 고대인지 21세기인지 시공간이 혼재되더니, 마지막에 누트의 이상형은 결국 재력을 겸비한 21세기 남성이다.
본문에서 묘사된 누트는 한 사람의 여자일 뿐 아니라 태양과 샛별도 맞먹는 별이고, 태생이 고귀한 바람의 딸이므로 길가의 꽃들조차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앞다투어 향기를 발산한다.
그런 누트는 자신을 남몰래 사랑하여 13세 이상의 남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오빠를 주저 없이 쫓아내고, 이웃나라를 침략할 자신의 군대를 현대화시킬 능력이 있는 그녀의 짝을 찾는 것이다. 결국 누트는 평범한 서민이 일생을 함께 할 반려를 찾는 것이 아닌 이해타산적이고 정략적인 결혼 상대를 찾는 것이 아닌가.
재력 외의 모든 조건이 부차적인 것일 수 있다는 점은 고귀한 누트로썬 꽤나 파격적이라고 생각됐다. 누트가 찾는 남자를 아는 사람은 편집자 앞으로 편지를 보내달라는 화자의 당부는 허황된 이상형을 바라는 누트를 비꼬는 것 같으나 그녀의 신분, 재력, 용모를 고려했을 때 그녀가 내건 조건은 오히려 겸손하기까지 느껴진다.
만약, 누트라는 현실인지 허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이 고귀한 인물을 앞세워 결국 여자들이 남자를 만날 때 이리저리 각을 재지만 최종 목표는 돈이라고 게 작가가 내세우려는 메시지라면 적잖이 실망스러울 것 같다. 작가가 수차례 강조하는 사고의 유연성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포도주에 진주를 녹여 먹는 클레오파트라 역시 사치스러운 세기의 요부로는 널리 알려진데 비해 그녀가 선대 이집트의 왕들이 싸놓은 똥을 치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 일궈낸 성과는 묻히곤 하는 것처럼, 현자로부터 영웅담을 듣고 생각에 잠기는 누트가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새로이 몰두하는 소일거리로 표현된다. 권력을 쥔 여자의 야망이 평가절하되는 것은 안타깝다.
여담으로, ‘시어머니를 떠맡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라는 대목에서, 역시 고부갈등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이집트나 만국 공동이구나 싶다.<암흑>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흥미진진하고 생생한 과정이 묘사되어 매우 기발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황혼의 반란>에서도 그렇고 이번 에피소드에서도 작가는 노인을 단지 힘없는 수동적 존재가 아닌, 생존을 위해 방어하고 외부의 위협에 맞서는 적극적인 주체로 그려서 개인적으로 맘에 든다.
<암흑>의 이야기는 비록 절망적으로 끝났지만, 이야기 이후에서는 어둠을 몰아 내주던 빛의 세상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한 카미유가 소망과 의지대로 그가 밝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그 주인에 그 사자>
유행을 따르는 것의 단점은 그 유행 자체가 곧 유행에 뒤지게 된다는 것이다.
동물을 공생의 존재가 아닌 실험하고 유행과 기호에 따라 선택한다고 기른다는 점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유행에 따른 획일적인 사고가 확산된다는 점과 무분별한 과학의 발전이 초래한 결과를 풍자하는 점은 <달착지근한 전체주의>와 일맥상통한 에피소드이다.
유전자 조작으로 외로움을 충족시키면서 순종적이고 허영심을 만족시킬 애완용 개를 품종개량하더니 아예 육식동물 중 상위 포식자인 사자 변종을 탄생시킨다. 유행을 위해 맹수를 키우다니! 본문 속 묘사가 소설이라고 과장돼 보이지만 사실 현실에서도 이런 인간의 허영심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철근이 드러날 만큼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라도 노다지 동네라는 이유로 천정부지 오르는 현상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람이 살기 위한 집이 사람 목숨보다 위인 듯, 이 소설에선 집 대신 사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맹수의 속성이 남은 사자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사자의 유행은 한물가니 사자를 처리할 방법으로 또 다른 맹수를 개발한다. 아예 동물이 상품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편의와 구미에 맞게 유전자가 조작되고 품종이 개량되어 값을 지불하고 거래하니 아주 다른 말은 아니다만 살아 숨 쉬는 생명을 두고 상품이란 표현은 참 불편한 진실이다.
더 우스운 것은, 사자로 하여금 유행을 선도하여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 동일 기업에서 또다시 사자로 인한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행을 선도한다(우리나라 기업이었다면 진작 매장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들은 고객만족이라는 명분 하에 자신들의 부가가치를 얻기 위해서라면 생명윤리에 대한 규범쯤이야 대수롭지 않으니 어떻게 보면 대중을 기만한 것이나 다름없잖은가.
물론 이 회사가 유행을 선도한 것이나, 기이한 사회현상의 원인은 모두 여론을 기반을 한 것이니 이쯤 되면 대중이 멍청하기 짝이 없다. 작품은 새로운 상품의 개발로 끝났지만, 결국 사자를 처리하는 그 애완동물은 또 다른 형태로 사회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는 인간의 욕심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물론 인간이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 포식자라고 여기는 혹자는 이 역시 자연의 흐름이고, 인간의 허영이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만족하는데 일조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볼 것이다. 그런 관점도 일리가 없다고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불을 발견하여 문명을 일구고 지구 밖에까지 탐사를 떠날 만큼의 지성체인만큼, 일말의 윤리의식으로라도 눈앞의 유흥과 이익에 쫓아 결국 자신에게로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되돌아올 해악 역시 외면해선 안 될 것이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내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에서 등장하는 미지의 존재가 인간의 행동과 패턴을 탐구하고 사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인간 외의 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교배시켜 만들어진 이른바 반인반수가 탄생되어 버젓이 내 앞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뒤늦게 생명의 존엄성 운운하기에는 너무 늦지 않을까?<말 없는 친구>
“그들은 늘 폭력으로 자기들의 존재를 표현하고 싶어 했어… 옛날에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살생을 했어. 요즘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살생을 하고 무엇 때문에 서로 죽이는지 모르겠어.”
작가가 당시 생명에 관한 세계적인 연구의 최선두에 서 있는 생물학자 제라르 암잘라그 교수와 토론을 벌인 뒤에 쓰인 작품으로 소설에 언급된 과학적인 발견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이라고 한다.
이 작품 내에서 이지도르를 통해 소개되는 제라르 로젠이라는 교수가 아마도 이 암잘라그 교수의 성씨만 바꿔서 그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또, 중간에 이지도르가 조카인 아나이스에게 “독자들에게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지.” 라고 ‘참을성 있게 이은’한마디는 작가 자신에 대한 짤막한 소개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내(화자)가 과거의 사랑했던 너에 대한 애절한 회상과 독백으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3인칭 관찰자 시점의 개입으로 과거의 어느 사건의 전개와 번갈아 진행된다.
1인칭 시점에서의 과거를 회상하는 화자의 독백과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는, 각자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듯 교차를 반복할수록 밀접한 관련성을 드러내고 3인칭 시점에서의 사건의 긴장감이 현재에 와서 최고조에 이르자 비로소 시간대가 맞물려 결말까지 쭉 이어진다.
‘나’에 대해서 작가는 처음부터 알려주는 대신 서서히 드러낼 요량으로 종종 ‘올려다보는’,‘’내려다보는’이라는 서술과 이지도르가 등장하며 조카 아나이스에게 설명하는 장면을 통해 ‘나’라는 존재에 대한 복선이 조금씩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지도르가 만나는 그날에 비로소 드러나는 나의 외형에 대한 서술적 묘사 이전에 이미 삽화에서 대놓고 등장하는 바람에 긴박감이 떨어져 아쉬움이 크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몇 가지 있는데 먼저, 여자는 돈이나 다이아몬드라면 눈이 돌아간다는 대목이다. 이는 이전 작품들을 통해서도 종종 눈에 띄던 여성에 대한 편협적 사고의 일환으로 짐작된다.
두 번째로는, 왜 아나이스의 엄마와 아빠는 아나이스가 꿈에서 조르주를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더러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까지 한 걸까? 아나이스가 조르주에게 우리 엄마를 이해할 수 있냐고 질문했듯(근데 아빠도 비정상이라고 했다며?) 나 역시 의문이다. 원문에서 ‘보았다’라는 말에 다른 이중적 의미가 있나?
여하튼 인간이 아닌 ‘나’의 내적 긴박과 아나이스를 살해한 진범을 밝힐 단서가 드러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사건이 마무리되면서 ‘나’의 독백으로 에피소드는 끝을 맺는데, 내내 아나이스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에 대한 전개는 온데간데없이 별안간 ‘너무 폭력적이기 짝이 없는 너희 인간들아, 이제 얘기를 좀 할까?’라는 마무리가 뜬금포로 느껴졌다.
작품 내에서 ‘나’는 마흔두 살에 내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어떤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는 모습에서 비폭력과 평화의 소통을 염원하는 작가 자신을 투영한 느낌이 들지만, 작가와는 제삼자인 독자의 입장으로 아무래도 개연성이 떨어진듯한 마무리는 다소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어린 신들의 학교>
지구의 인간들이란 꽤나 안쓰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들은 항상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며 아무것이나 믿고 의지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애원하기가 일쑤다.
“자신의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는 말 것… 항상 겸허한 모습을 보이고 유머 감각을 잃지 말 것.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바라볼 것.”
<천사들의 제국>의 후속 편이 될 작은 실마리로 우리를 이끄는 신들의 일상생활과 교육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내가 느낀 바로는 신이라 해서 종교적인 내용이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사 쪽에 더 가깝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와 과학은 상생하며 발전해 왔다. 1세대의 시조신이 있고, ‘나‘는 1세대가 만들어 놓은 계보를 거의 그대로 물려받은 후대의 어린 신들 중 하나로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실습하고 시험(직접 인간을 다스리는)을 치르는 시행착오 과정이 마치 게임 <문명>을 연상케 한다.
인간이 경외하는 신들조차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며 선생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듣다니! 인간으로 치면 ‘나’는 그저 평범한 여느 중, 고등학생일 테지만, ‘기분에 따라 자동차 사고나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건물 벽에 금이 가게 한다는 것은 참 재미있다.’ 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나’는 비록 어린 신에 속하나 인간의 평균 수명의 몇 배를 뛰어넘는 2천여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열두 차례 이상의 문명을 일구고 통제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다만 이 에피소드가 저자가 쓴 다른 초월적 존재와 차별성이라면, 이 어린 신이 자신들 역시 어떤 우월한 존재의 장난감이 아닐까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
‘나’의 동료가 툭 던졌던 한마디 말에 혼란에 빠지고, 끝끝내 ‘나’는 이러한 사실을 지극히 부정하지만 돌아오는 건 껄껄거리는 ‘나’의 동료이자 어린 신의 웃음이었다. ‘나’를 경배하는 인간을 내려다보며 장난질하듯 ‘나’ 또한 떠받들어 찬양하는 높은 차원의 신들에 의한 장난질이 아니냐는 의문에 혼란스러워하고 부정하는 모습, 농락 위의 농락인 것이다.
어린 신들의 스승은 맨날 훈계하고 구박하는 늙은이일지언정(그들이 어린 신들에게 늘어놓는 잔소리 중에 ‘선반에 번개를 새로 채워놓아라’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다.), 자기들의 백성을 굳건하고 창조적인 문명의 주인공으로 만든 예술가이자 과학자라며 그들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이 에피소드에서 재밌는 점은, 이들에게 시조신이란 신계에서 더 신적인 존재라는 것과, 어린 신들이 준거로 삼는 시조신의 경험을 토대로 수메르형, 잉카형 등 문명의 형태가 정형화돼 있을 뿐 아니라 토기부터 탱크까지 문명의 발전 단계도 이미 파악하고 있음에도 기존의 문명이 몰락하고 다시 새로운 문명이 건설되면 도로 ‘리셋’이 된다.
인간이 원시시대에 자연물로부터 도구를 발견한 후 2천 년 동안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 몰락하면, 다른 민족을 통해 명맥이 이어져 발달하는 것이 아닌 원시시대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이는 작가의 다른 작품인 장편소설 <파피용>이 연상되는 설정이다).
그렇기에 작품상 어린 신들이 다루고 있는 문명은 현재 진행형일 수도, 먼 과거이거나 먼 미래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제가 불분명하다.
또, ‘민주주의는 진보된 국민들만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가장 알맞은 때를 선택해야 한다.’ 거나, ‘모든 에너지를 전쟁에 쏟는 것은 패망의 길이다.’ 라며 전쟁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작가의 비폭력주의가 여실히 드러난다(<나무> 중에서 1인칭 시점 작품의 경우 대부분 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경향으로 느껴졌다).
<트루먼 쇼>나 <인사이드 아웃>과 같이 나라는 사람이 사실은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사는 삶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한창 사춘기였던 시절 오래도록 품어왔던 것 같다(더 어린 시절에는 <인사이드 아웃>에서처럼 내 머릿속에서 나의 감정을 컨트롤하고 조종하는 인물들이 존재한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내가 결정짓고 나를 이루는 내 주변 환경이 이룩한 나의 삶은 결국은 내가 살아내야 할, 내가 주인인 나의 삶이었다.
내가 느끼는 생각, 감정, 선택, 행동 모두 살면서 내 주변의 영향에서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한 번뿐인 나라는 삶이다. 그렇게 결론짓고 나니 ‘나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의 강박에서 아주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한창 사춘기 시절에 읽었던 이 소설을 강산이 바뀌어 네 아이의 엄마가 돼서 다시 읽으니 다르게 보이는 관점은 이러한 나의 사고의 변화가 큰 몫을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에피소드 역시 전에 읽었던 것과는 다르게 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후기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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